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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Nov 13. 2018

나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냉정과 열정사이, 이공계 탈을 쓴 몽상가

 현재의 서구의 정신세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상의 흐름이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사상인 헬레니즘과 중동 유대인의 유일신 사상인 헤브라이즘이다. 이와 비교되는 동양의 정신세계를 관장하는 사상으로 손꼽으라고 하면, 유교와 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 헬레니즘은 제우스, 아폴론, 아테나 등 종교적 의미에서 다신교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철학, 문화, 국가로 대표되는 소위 문명의 바탕을 쌓아올린 위대한 체계이다. 번개가 치는 건 제우스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징계가 아니라, 구름이 대전되어 나타내는 자연현상을 규명하는 게 바로 헬레니즘의 본질이다. 그에 반해 헤브라이즘은 여호와 또는 야훼라고 불리우리는 유일신이 본질인 종교이다. 인간은 아담 이래로 원죄를 짓게 되고, 그 댓가로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얻게 된다. 고통받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여호와의 독생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마침내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20세기 말 지구별에 태어난 행운아인 나 또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영향을 듬뿍 받았다. 한국전쟁 이후에 대한민국은 미군정의 영향으로 서양식 교육체계를 받아들이게 되고, 나도 그 교육의 체계 속에서 ‘국영수’을 잘해야 공부를 잘하는 학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고2학년에 나의 적성과는 다르게 이과를 선택하고,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공학도로서 지금껏 지내왔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절에는 철학과 과학이 한 몸체였지만, 사유라는 한 몸체를 가진 철학과 과학은 수학을 깃점으로 ‘수포자’를 만들었다. 사실 대한민국의 수학교육도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암기와 선행학습을 기반으로 해서 사실상 논리와 사유로 이루어진 학문이 아니었다.


 나의 헬레니즘은 “이성”에 기반한다. 논리적 근거를 기반으로 명제를 찾아내고, 그 명제를 전개하여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나의 헬레니즘은 냉정하다. 특히나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배워온 적미분(미적분이 아니라 적미분으로 불리워야 온당하다. 그 이유는 나중에 한번 다뤄보기로 하자.)과 뉴턴의 물리학을 기반으로 한 과학구조의 체계 앞에서 나는 사유한다. 어린 시절에는 평화의 댐을 짓지 않으면, 서울이 물바다가 되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서울이 물바다가 되기 위해서는 터무지 없이 많은 물이 있어야 함을 알기에 평화의 댐이 말짱 거짓말인 것도 알고 있다.


 저 하늘의 별은 수십억년 떨어져 있는 별들의 빛 때문에 반짝인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리고 더이상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나의 이성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의 원인이 터무니없는 신화나 미신이 아님을 알고 있다. 밥상 모서리에 앉거나, 다리를 떤다고 복이 달아나지도 않는다. 어떤 사건을 일어나는 원인이 처녀귀신의 한서린 원한도 아니며, 나의 조상이 나를 위해서 복을 내려주는 것도 아님을 ‘냉정하게’ 알게 된다.


 나의 헤브라이즘은 “열정”에 기반한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개인 가정사 때문에 온 가족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배운 “논리”의 체계를 뒤흔드는 일들이 성경에서는 매우 자주 일어났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고, 십자가에서 죽은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했다. 특히나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젊은 지구’에 대한 논쟁은 매우 혼란스럽다. 성경에 따르면 지구는 대략 5천년 전에 탄생했다. 하지만 여러 과학적 증거는 50억년 전후로 지구의 수명을 예측한다. 또한 생명체가 진화했는냐에 대한 논란은 찰스 다윈 이래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나의 헬라니즘과 헤브라이즘은 DNA의 이중 나선처럼 나의 세계관을 이루고 있다. 두 사이에 평형선을 이룬 채로 두 가닥이 꼬여 있다. 지금까지도 나는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인생을 살아간다. 이공계의 탈을 쓴 몽상가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의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의심을 끝까지 파헤져보는 지적 호기심은 아직도 왕성하다. 또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뜻하지 않은 감수성으로 예민해져 눈가가 촉촉해 지기도 한다. 새의 날개가 두 개 인 것처럼, 나의 뇌도 헬라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균형을 받으며 사유하고 감동을 받는다.


 어쩌다 보니,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아직도 꿈꾸는 몽상가로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난 체 게바라의 말이 아직도 유효하고 가슴 떨린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키우자!” 난 오늘도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분석한다. 또한 가슴 속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하는 시인이 된다. 엊그제 포항 월포해변에서 밤하늘의 초승달을 보며 서정주의 동천 시를 떠올렸다. 난 아직도 초승달을 보면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떠오르는 천상 “몽상가”이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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