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윤식 Dec 03. 2018

용의자 X세대의 헌신

나는 왜 잉여인가?

 본격적으로 일본 문학소설을 읽기 시작한 지 5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추천 목록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소설이 있다.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작품이다. 최근작 연애의 행복을 포함하여 위험한 비너스, 라플라스의 마녀, 공허한 십자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을 대여섯 편 읽어본 독자로서 단언컨데 그의 최고의 작품은 “용의자 X의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천재 수학자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이를 밝혀나가는 추리소설이다. 독자 여러분께도 강력하게 추천드린다.


 최근 회사에서 실시하는 교육을 받았는데, 강사님의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세대별 특징을 설명하는 자리가 있었다. 나이 순으로 따지자면 386세대 - X세대 - Y세대 - M세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1976년 용띠생인 나는 X세대이다. X세대는 “응답하라 1994” 마지막 편 삼천포 김성균의 나레이션에 나온 바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모두를 경험한 축복받은 세대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 생각하니, 1995년 대학 입학할 때는 삐삐를 사용했고, 군대 갔다오니깐 시티폰을 썼고, 졸업 즈음엔 PCS 휴대폰을 사용했다. 아날로그 테입으로 이문세, 서태지를 듣기 시작하다가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을 CD로 들었고, 졸업할 때는 아이리버 MP3 CD로 구운 최신음악을 듣고 했다.


 그렇게 최첨단을 달리는 신세대로, 기성세대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X세대”라는 호칭을 부여받고, 싸가지 없는 날나리로 1990년 후반과 2000년 전반을 살아왔다. 선배님들의 이데올로기 투쟁보다는 각자의 행복과 자아실현이 먼저라고 생각했고, 국가주의보다는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로 성장해왔다. 그런데, 시대가 2000년대를 지난 2020년에 가까워오자, X세대는 낀세대가 되어버렸다. 청년기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동시에 경험한 축복받은 세대였지만, 지금 중년 아재가 되어버리고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잉여가 되어버렸다.


 나 또한 회사에서 잉여로 살아가고 있다. 내가 회사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자가 되기 보다는, 아니 솔직히 얘기해서 승진해서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들지 않는다. 다만, 나의 시간을 나의 의지로 살아가기 원하고, 타인의 삶을 이래라 저래라 통제하지도 않으며, 또한 내 삶도 전체주의에 강요되지 않았으면 한다. 주말에 출근하는 날보다는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내게 주어진 몫을 충분히 감당하는 “합리적이고 책임감 있는 개인주의자”로 살고 싶을 따름이다.


 난 내 속에 살아 꿈틀거리는 “꼰대, 국가주의자, 전체주의자, 조직주의자”를 죽이는 “용의자 X세대”가 되고 싶다. 퇴근 길에 높은 양반의 벙개 회식에도 “선약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소심하지만 용기있는 개인주의자가 되고 싶다. 나 또한 직원들에게 벙개 회식을 제안하더라도, 직원들의 “선약이 있다”는 대답에 쿨하게 넘길 수 있는 소심하지만 쿨한 개인주의자가 되고 싶다. 난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규율, 선후배, 나이, 서열, 학벌, 학연, 지연”에 기대지 않고 “자율, 수평, 개인, 자유, 변화, 합리”로 가는 잉여인간이 되었으면 한다. 나를 징검다리로 해서 후배님들의 세대가 훨씬 빛이 났으면 한다.


 내 스스로 이 시대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다. 그저 지나가는 엑스트라이던, 죽은 체하며 누워 있는 시체 5의 역할이라도 감사하며 맡은 바 배역에 충실하고 싶다. 이 시대의 주인공이기 보다는 내 삶의 주인공으로서 삶이 내겐 백배, 천배 중요하고 소중하다. 언젠가 유시민 작가가 본인을 잉여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사실 유시민의 시대적 자산을 참여정부에만 소비되고 활용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 스스로 잉여라고 말하는 고백을 듣노라면,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감히 유시민 작가와 비교하는 건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때나마 “X세대”로 살아온 1976년생 95학번의 중년 아재로서 이 세상에 헌신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사회를 무수히 많은 개인주의자들이 기를 펼 수 있도록 내 속의 “국가주의”를 죽이는 일이다. 이 시대에서는 잉여인간이지만, 내 삶에서는 “주연인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용의자 X세대의 헌신”이다. 마지막으로 삼천포의 마지막 나레이션을 용의자 X세대의 최후진술로 대신할까 한다.


 “그리고 90년대를 지나 쉽지 않은 시절들을 버텨 오늘까지 잘 살아남은 우리 모두에게 이 말을 바친다. 우린 참 멋진 시절을 살아냈음을, 빛나는 청춘에 반짝였음을, 미련한 사람에 뜨거웠음을 기억하느냐고, 그렇게 우린 왕년에 잘 나갔었노라고. 그러니 어쩜 힘겨울지도 모를 또 다른 시절을 촌스럽도록 뜨겁게 사랑해 보자고 말이다.”


P.S 오늘의 BGM은 공일오비의 신인류의 사랑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별 헤는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