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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Mar 06. 2019

꼰대 인증 글 : 유일약국 큰 아들, 이 한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한 해가 지나고 한 살을 더 먹었다. 하나의 숫자를 더해진다는 건 지구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생기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작년까지는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했지만, 올해부터는 신체적 변화가 심상치 않다. 우선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어제 멀리서 브라질에서 출장 온 동기녀석을 환영해주기 위해서 포항 시내에 있는 물회집에 갔었다. 물회 한 그릇을 먹고 나서 오후 내내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좀 많이 먹었다 생각이 들었지만, 1~2시간 이후에는 속이 편했는데, 요즘은 오후 내내 불편하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소화도 잘 안된다고 하더니, 요즘은 그 옛 사람들의 이야기에 고개가 절로 끄떡여진다.


 두번째 변화는 자꾸 옛날 생각이 뚜렷하게 나게 되었다. 설날에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부산 영도에 다녀왔다. 우리 집은 골목길에 위치한 주택인데, 골목길을 빠져나와 찻길로 나오면 길모퉁이 조그만 사거리가 나온다.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1990년 정도로 돌아가보자. 대략 30년 전이 넘은 이야기이다. 여기서부터 진짜 얘기가 나온다. 그리고 이 글은 내가 “꼰대라는 인증” 샷을 날리는 프사(프로필 사진)이기도 하다. 어쩌겠는가? 나도 나이를 먹어 점점 옛 생각이 뚜렷해지고, 추억을 기억해내고 옛날 이야기에 혼자 취해 넋두리 하는 중년 아재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90년 봄 정도 되었나 보다. 동네 모퉁이 사거리에 있던 식당 집이 갑자기 없어지고, 그 자리에 약국이 들어섰다. 또 2층도 공사를 하더니 그 집에 새로운 친구네가 이사를 왔다. 그 약국 이름이 유일약국이었고, 그 친구 이름은 이 한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약국이 500m 거리에 있었는데, 우리 동네 유일한 약국이었던 유일약국이 생기고 나서 100m 이내에 약국이 생기게 되었다. 그 시절은 약국에서도 감기, 몸살, 소화불량을 얘기하면 약사님이 만능의 약을 조제해주던 시절이라, 병원보다더 훨씬 자주 갔었다.


 유일약국 친구네는 원래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 고향에서 사업차 부산에 이사를 왔다고 했다. 이 한이 어머니는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대학나온 슈퍼파워 커리어 엄마이지 약사였고, 이 한이네 아버지는 돈을 짱짱 버는 대학나온 사업가 사장님이었다. 아직 거실공간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그 친구 집에 가서 소파가 놓여져 있는 것에 놀랐고, 내 인생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을 처음 경험했다. 무엇보다 부러웠던 건 이 한이 방에 있던 끝모를 세계문학전집, 두산대백과 사전이었다. 맨날 골목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로 놀던 내 친구들 사이에서 이 한이는 “유일약국 큰 아들”이었다. 방과 이후에는 다들 이 한이네 집에 모여서 새로 나온 휴대용 게임기를 했다. 나는 친구들과 노는 척하다가 이 한이네 방에서 가서 우리 집에 없는 수 많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유일약국 이 한이는 특별히 잘 산다는 티도 안나고, 약사 어머니도 우리가 못산다고, 깨죄죄하다고 타박하지 않으시고 늘 찾아오는 우리들에게 오렌지 쥬스이며, 과자도 아낌없이 내어주시던 마음씩 따뜻한 어머니셨다. 그 다음 해에 이한이는 자연스럽게 반장이 되었다. 우리 친구 들중에서 유일하게 서울 말 쓰는 이한이는 우리가 쳐다볼 수 없는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스스로 과시하거나 우리를 무시하거나 핀잔을 주는 친구가 아니었다. 특별히 여자 아이들의 관심과 애정을 뜸뿍 받는 친구였다. 굳이 따지자면, 개그콘서트에서 여자 개그맨들이 비슷한 수준의 남자 개그맨을 보아오다가, 새로 온 개그맨이 정우성 외모를 가진 셈이다.


 하지만, 유일약국은 오래 가지 못했다. 무슨 이유인지, 이한이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친구 집에 놀러가면 이한이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끔 다투는 모습도 보곤 했다. 그러더니, 약국은 일주일에 1~2일씩 휴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더니 여름방학이 끝나고 갑자기 한이가 서울로 다시 전학을 간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동네 유일한 약국 이었던 유일약국은 그렇게 사라졌고, 약국집 2층 집에도 다른 사람이 이사를 들어왔다. 더이상 우리들은 이한이를 볼 수 없었고, 어머니가 주시던 따뜻한 우유도, 새콤한 오렌지 주스도 먹을 수 없었다. 난 아직도 이한이가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중에 전해들은 얘기로는 이한이네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지고, 엄청난 빚을 얻게 되었고, 약국까지 처분하고 이사를 갔다는 얘기만 들려왔다. 부모님도 이혼했다고 하나, 사실 유무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아직도 기억하는 순간이 있다. 나는 방과 후에 집에 가방만 내어두고, 유일약국에 갔다. “어머니, 이 한이 집에 있어요?”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약이 놓여 있는 뒷공간으로 가시더니 어린이 비타민을 하나 주셨다. “윤식아, 이 한이 2층에 있어. 이건 어린이 비타민인데 먹어봐 맛있어.” 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리곤 “너는 우리집에 오면 맨날 책을 읽던데,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라고 물으셨다. 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이 한이가 커서 과학자가 되는게 꿈이래요. 저는 이 한이를 도우는 친구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 시절, 난 정말로 이 한이가 똑똑해서 엄청난 과학자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 한이를 보조하고 도와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그래.. 너도 꼭 커서 과학자가 되거라. 같이 도와주면서 하다보면 둘 다 멋진 과학자가 될꺼야” 라고 말이다.


 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꼭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영화에도 주연이 있고, 조연이 있듯이 말이다. 주연이 살아나도록 조연은 악랄하게 연기해야 하기도 하고, 망가지기도 해야 한다. 1990년 즈음에도 그랬다. 구김없고, 아낌없이 잘 사는 이한이 식구로부터 받은 게 너무 많았다. 그래서 이한이를 잘 될 수 있도록 내가 뭐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다. 내가 빛나거나, 내가 조명을 받을 필요가 없다. 난 그저 조연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지난 번에 쓴 글 처럼 “용의자 X세대의 헌신”이라는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난 커서 뭐가 되고 싶었을까? 그리고 난 이미 커버리고, 뭐가 되었나? 여전히 그 대답은 같다. “이 시대 수많은 이한이를 도우는 친구가 되고 싶다” 그런데, 진짜 궁금하긴 하다. 유일약국 큰 아들, 이 한이는 어디서 뭘 하고 살고 있을까? 만약 다시 만날 수 만 있다면, 이제는 내가 어린이 비타민 1년치는 이한이 아들, 딸에게 사주고 싶다. 역시나 꼰대 인증 글이다. 이렇게 옛 이야기를 늘어놓는 중년 아재의 넋두리.. 이 한아 고맙다. 그리고 보고 싶다.


P.S 언제가 꼭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서 이한이네 소식을 꼭 알아봐야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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