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윤식 Oct 14. 2019

토끼와 거북이의 진실

부지런한 거북이가 지지 않는 방법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이야기인 토끼와 거북이로 글을 시작해본다. 글쓰기 욕구가 넘칠 때에는 매일 한 편씩 글을 쏟아붓다가도, 메마른 가뭄과 같은 나날이 오면 몇 달째 한 글자라도 끄적이기 싫을 때가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글쓰기 주제가 넘쳐나거나, 소재가 고갈 나서 글쓰기에 대한 애착이 넘쳐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에 대한 습관이 글쓰기의 태풍과 가뭄을 불러일으킨다.


 난 어릴 적에 토끼와 거북이 이숍 우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뻔하게 이길 걸 알고 거북이에게 시합을 제안한 토끼의 자만심, 거북이에 대한 무시하는 맘이 싫었다. 또 옆에서 쿨쿨 자고 있는 토끼를 깨우지 않은 거북이의 심술 같은 마음도 딱히 내키진 않았다. 자기를 무시한 토끼가 밉긴 할 테지만, 시합 도중에 쿨쿨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토끼에게 단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은 거북이의 차가운 마음도 영 별로였다. 물론 이 이야기는 게으른 천재를 이길 수 있는 부지런한 보통사람에게 큰 위안이 되는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니, 부지런한 천재가 게으른 보통사람보다 많다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대충 어림잡아 따져보면 부지런한 천재 1%, 게으른 천재 4%, 부지런한 보통사람 70%, 게으른 보통사람 15% 정도 되는 거 같더라. 게으른 천재의 경쟁상대는 부지런한 보통사람이 아니라 부지런한 천재이고, 부지런한 보통사람의 경쟁상대는 게으른 보통사람이 되는 게 냉정한 이 땅의 현실이더라. 천재와 보통사람의 간극이 지금은 금수저와 흙수저로 새롭게 읽히고 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현대판으로 읽어보면 계급론이 된다.


 나는 지금까지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이렇게 읽어왔다. 보통사람도 열심히 살면 언젠가 재능 있는 사람들을 이길 수 있다는 스토리로 해석했다. 그래야 내가 거북이(흙수저)로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만족할 수 있고, 인생이라는 긴 레이스에서 토끼(금수저)를 이길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토끼와 거북이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토끼와 거북이를 “나”와 “타자”로 인식하지 않고, 내 속에 있는 “게으름과 부지런함”으로 인식해보니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었다.


 도끼와 거북이를 천재와 보통사람이라고 읽으면, “나”와 “타자”로 해석된다. 하지만 게으름과 부지런함으로 읽으면 나라는 주체 안에 있는 품성의 속성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되니, 나보다 더 돈이 많은 “토끼”를 부러워하지 않게 될 수 있었다. 내 속에 있는 게으른 “토끼”를 깨워서 부지런한 “거북이”를 달리게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만 43년이 걸렸으니 나도 참 어리석다. 그래도 80년이 인생의 레이스라고 가정한다면, 이제 반쯤 지나온 셈이니 내 안에 게으른 토끼를 깨우고, 부지런한 거북이로 변한다면 레이스에서 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인생의 레이스는 내가 남을 이기는 시합이 아닌, 내 인생이라는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부지런하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 번씩 생각해본다. 난 내 인생을 “게으른 토끼”처럼 살았는지? 아니면 “부지런한 거북이”처럼 살았는지? 인생의 레이스는 “나와 너”의 시합이 아닌 내속에 “토끼와 거북이”의 시합이다. 부지런한 거북이가 지지 않는 방법은 그저 한걸음 한걸음 목표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 것이었다. 내가 금수저이던, 흙수저이던 난 그저 내 안에 “토끼와 거북이” 시합에 집중할 것이다. 오래간만에 글쓰기 한편으로 한 걸음을 내디뎌 본다.

작가의 이전글 이른 추석을 맞이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