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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Oct 28. 2019

10월 27일,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그대여

 날씨가 많이 스산해졌다. 주말을 보내는 동안 인터넷 검색에 유달리 거명되는 두 사람이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2014년 10월 27일에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두 사람이 유명을 달리했다. 한 사람은 궁정동 안가에서 친구이자 부하였던 사람에게 총에 맞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수술대 위에서 의사에게 수술칼로 의해 하늘나라로 갔다. 한 사람은 집단을 위해서 개인을 희생해야 잘 산다고 얘기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집단의 목적 앞에 개인의 행복을 희생해선 안된다고 얘기했다. 불과 하루 차이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그 두 사람의 죽음의 하루 간격을 결코 좁히지 못하고 있다. 오늘은 10월 27일,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아직도 기억하는 순간이 있다. 중학생 때였던 거 같다. 그 시절 철없는 중학생들은 공부하는 척 책상에 앉아서 라디오를 즐겨 들었다. 매일 밤 10시에 FM 라디오 채널을 맞춰놓고 신해철의 밤의 디스크쇼를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는 내 인생 많은 일들이 생겼다. 단군이래 전 세계에 한겨레의 위용을 뽐내는 88 서울올림픽을 눈으로 보는 호사도 누렸고, 수업시간 마치고 10분 쉬는 시간마다 카세트 테이프에서 나오는 반주에 맞춰서 모든 친구들과 함께 “손에 손잡고”를 불러야 했다. 이제 대한민국이 더 이상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에 내놔도 손색없는 위대한(?) 나라이구나.. 이런 웅대한 기상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초등학생 6학년이 보기에도 요즘 말로 하면 우리나라는 뭐든지 씹어먹을 기세였다.


 그렇게 1988년이 끝나가던 즈음에,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족끼리 TV 앞에 앉았다. 그때만 해도 우리 집은 교회를 가지 않을 때라, 저녁을 먹고 이부자리를 펴놓고 TV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 부모님 모두 최종학력이 중학교가 끝인지라 자식들은 대학을 어떻게든 보내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대학생들의 꿈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랑이 꽃피는 나무”도 같이 보게 하시고, 강변가요제보다는 대학가요제를 보여주셨다. 대학생이 되면 최수지 같은 이쁜 여대생들과 미팅을 할 수도 있고, 니가 음악을 좋아하면 대학가요제에도 나갈 수 있다.. 뭐 이런 취지로 말이다. 하지만 막상 대학 가보니 대학을 가본 적이 없는 부모님 말씀이 개뻥이라는 건 일주일 만에 알아버렸다. 그건 사실 개뻥이 아니라, 순진하게 믿었던 내 잘못이 더 크다.


 초등학생 6학년은 졸린 눈으로 TV를 보다 말다가 눈이 감기다 말다를 반복하며 엄마 무릎을 베고 자다가, 전주 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 그 유명한 그대에게 전주였다. 13살이 인생의 전부였던 초등학생 6학년 인생 최초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긴 전주를 가진 곡은 없었다. 나에게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건즈 앤 로지스의 노멤버 레인과 더불어 3대 전주 명곡에 속한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즐겨 노래부르곤 했는데, 곡 선정해놓고, 떼창으로 전주를 부르곤 했다. 졸린 눈으로 맨 마지막 곡만 들었는데, 왠지 저 형님 밴드가 1등 할 것 같았다. 그렇게 1988년 12월 24일, 대학가요제 대상과 함께 나의 신해철 빠돌이 생활은 시작되었다.


 언젠가 신해철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학창 시절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사실 가슴에도 와 닿지 않는 말이다. 지금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 이유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입신양명, 금의환향이 아니었던가? 밤잠 못 자가며 자율학습 다니고, 학원 다니는 이유는 바로 출세하기 위해서였다. 가난한 집 큰 아들로 태어나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이 부러워할 거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였다. 그렇게 집단을 위해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면 가족, 친지, 친구들이 나를 인정해주고 나는 좋은 집안과 장가도 하고 “사”자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 형님은 훌륭한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얘기 버렸다. 10월 26일에 죽은 사내는 나라를 위해 “훌륭한 사람”이 되길 원했는데 10월 27일에 죽은 사내는 나를 위해 “행복한 사람”이 되길 원했다. 나도 그 두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했다. 훌륭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의 갈림길에서 말이다. 그런데 훌륭한 사람이 되기에는 내가 능력이 부족하고, 그만한 배짱도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나마 실행 가능한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13살 초등학생은 44살에 이르기까지 행복한 삶이 꿈인 평범한 아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평범한 아재를 문유석 판사가 행복한 개인주의자라고 명명했다. 아마 그 시절 나와 같은 13살 친구들은 신해철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보면, 국가나 회사와 같은 집단을 위한 헌신보다는 나와 가족을 위한 행복에 삶의 가치를 더 많이 두곤 한다.


 이제 글을 마친다. 10월 27일,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그 대답에 마지막 그의 가사로 대답한다.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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