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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Oct 25. 2019

어바웃 회사 1편

조직문화는 어디서 오는가?

 오래전에 묵혀두고 미완성 글을 다시 꺼내어 고쳐 쓰기란 여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짐 정리를 하다가 오래전 헤어진 연인에게 쓴 연애편지를 다시 읽어봤을 때 느꼈던 화끈거림과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것 같다. 하지만 글에 생명을 불어넣고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미완성 글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유통기한마저 한참 지난 글을 서랍 속에서 꺼내어 끄적끄적 여 본다.


제목 : 어바웃 회사 (조직문화는 어디서 오는가?)

 회사의 조직문화에 두고 이런저런 말과 글이 많다. 직장인의 회식문화에 빠지지 않는 단골 안주 또한 회사의 조직문화이다. 아직까지 대한민국 회사의 조직문화는 그 뿌리가 군대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차이가 있다면 군대에도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가 있듯이 좀 더 덜 빡세고, 좀 더 빡셀 뿐이고 입고 있는 옷은 군복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텔레비전이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이상적인 직장생활은 그저 상상 속에만 가능하거나 먼 회사 이웃회사(먼나라 이웃나라 패러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수장이나 총수들은 조직문화 개선을 위해서 직급을 없애기도 하고, OOO님이라고 불렀다가 OOO프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에 있는 존댓말, 존칭이 수평적인 조직문화에 장애가 된다고 해서 마이클, 릴리라고 부르는 회사도 있다.


 단언컨대, 대한민국의 조직문화는 반드시 변한다. 왜냐하면 늙은이는 죽고 젊은이는 늙고, 어린이는 자라기 때문이다. 역사의 어떤 세대도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천년만년 누리진 못한다. 그 껏 해야 30년 정도 지나면 다음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대다수 회사의 의사결정은 40~50대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조직문화도 그들의 입맛에 따라 바뀌게 되어 있다. 하지만 문화, 역사, 경제는 항상 진보 또는 발전하지 않는다. 현재 20~30대는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가 되었고, 50~60대는 부모를 모시는 마지막 세대가 되었다. 기성세대는 낀세대라고 칭하고 부모님을 부양하고 자식에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푸념하지만 그래도 그 세대는 대한민국 성장의 과실을 가장 많이 딴 세대이기도 하다.


 역사는 바꾸려는 자와 고수하는 자와의 주고받는 싸움이다. 이를 진보와 보수라고 불러도 좋고, 신세대와 기성세대라 불러도 좋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이토록 몸서리를 치며 부딪히는 이유 또한 바꾸려는 자와 고수하는 자와의 대결이기 때문이다. 다시 얘기하지만, 미래는 언제나 젊은이들이 몫이다. 왜냐면 늙은이는 모두 죽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젊은이도 늙게 되고 또 죽게 될 수밖에 없다. 회사의 조직문화를 얘기하려다가 너무 삼천포로 빠졌다. 회사의 조직문화는 어디서 오는가? 그건 그 회사의 의사 결정하는 사람들의 집단적이고 세대적인 경험에서 나온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고, 수직적인 가정, 학교, 군대를 거쳐서 회사에 왔다. 그래서 엄마, 아빠, 선생님, 선배, 고참, 사수의 말이 경험적으로 타당하고 통계적으로 성공한 경우가 많았다.


 자신에게 가장 효율적인 의사결정과 사고의 프로세스는 바로 “수직”에서 오는 지시였다. 하지만 그들이 경험한 이 문화는 이미 3만 달러를 넘어버리고 개개인화되고 파편화된 다음 세대에게는 맞지 않은 옷이 되고 만다. 앞선 세대의 수직문화와 후배 세대의 수평문화를 기이하게 느낀 일부 사람들이 바꿔보려고 노력하고 발버둥 친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일회성에 그치고 다시 회귀되고 만다. 그럼 정녕 방법이 없단 말인가? 방법이 있긴 하다. 바로 “시간”이다. 나이 드신 세대가 나가고, 젊은 세대가 나이가 들면 된다. 그래서 사회, 경제시스템은 혁명적으로 바뀔 수 있지만 문화, 사상은 점진적으로 변하게 된다.


 염세적일 수 있지만, 젊은 세대들이 결코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말자. 미래는 부장, 상무, 전무, 사장님의 것이 아니라 사원, 대리, 과장의 것이기 때문이다. (단, 아주 젊은 총수가 지배하는 회사는 계속 그분들과 그분들의 자녀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무작정 시간이 가길 기다려면 되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젊은이들이 늙어가도, 나보다 나이가 적은 “어린이”를 무시하지 않고, 내가 상사와 수평적이길 원하듯이 나의 후배가 나와 수평적인 걸 감내해야 한다. 야자타임은 내가 선배에게 OO야라고 부를 쾌감도 선사하지만 새카만 후배가 내 이름을 OO야라고 불러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겸양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글을 마친다. 이 나라도, 내가 다니는 회사도 변한다. 하지만 그 변화가 결코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진 않는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늙은이는 죽고 젊은이는 늙고, 어린이는 자라기 때문이다. 더러 늙은이가 젊은이보다 더 오래 살고, 어린이는 너무 빨리 죽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늙어도 비루하지 않고 젊어도 무례하지 않고 어려도 유치하지 않다. 그저 태어난 시간과 공간이 다를 뿐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변화시키고 싶은 조직문화도 나이가 들면 편해지기 마련이고, 내가 만든 조직문화를 내 후배들이 극혐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시간은 유한하고, 그 유한한 시간을 내가 점유하고 있을 때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후배에게 물려줄 유산은 자산이 아니라 부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다시 한번 질문 앞에 선다. 내 인생의 문제는 “왜 사는가?”로 귀결되지만 내가 속한 사회의 문제는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질문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갈 수 있을까? 의심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다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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