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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Jul 13. 2020

박원순, 백선엽 그리고 사도 바울

다소 정치적인 그러나 매우 개인적인

 목요일 저녁식사 중에 동석한 분이 박원순 시장이 행방불명이라는 기사가 떴다고 알려주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는 뉴스 포털을 도배하고 있었고, 온갖 추측성 보도가 난무하였다. 난 직감적으로 박원순 시장이 “성추문”과 관련된 일과 연관되어 있을 거란 추측을 하였고, 그 추측은 불행히도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625 한국전쟁의 영웅이자 친일 이력이 있는 백선엽 장군이 100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의 개인사는 불행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아울러 대한민국의 영욕의 역사와 겹쳐 있다. 두 사람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수많은 논란과 이야깃거리를 남겨두었다.


 다소 정치적이지만 그렇지만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고자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젊은 시절 과오(또는 반역)가 그 후 업적(또는 영웅적 행위)을 능가할 수 있는지? 아니면 한 사람의 인생이 일생동안 업적(또는 헌신)이 마지막 과오(또는 죽음)로 빛바랠 수 있는지 말이다. 사람마다 잣대가 다르고, 나 또한 백선엽 같은 동시대에 살았다면 친일을 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없다. 또한 나 또한 박원순 시장처럼 높은 자리에 오르고, 헛되고 끔찍한 욕망에 이끌려 돈, 성, 권력의 욕망을 이겨낼 수 있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선한 행동, 악한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를 어떻게 책임지냐에 따라 평가를 다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있다.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사울 시절에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를 고발하고 잡아 가두는 일에 매우 열심이었던 사람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일제시대에 독립군을 열심히 잡고, 고문하던 관동군 장교(그것도 한국계 일본인, 백선엽 같은 사람)였던 것이다. 스스로 신념을 가졌고, 그 신념을 위해서 매우 열심히 활동했다. 그러다가 예수를 만나고 회심하여, 이름을 바울로 고치고 누구보다도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데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로마에서 목이 잘리는 형벌을 받고 순교하게 된다. 그의 회심 이후의 업적은 그의 청년시절의 과오를 덮을 만큼 대단했던 것일까? 왜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의 반열(베드로, 바울)에 오를 수 있었을까?


 난 그 이유가 그가 청년 시절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성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피해자에게는 사과하지 않고, 교회 목사님이나 하나님한테 용서를 받았다고 간증하는 모 검사님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한다.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고의이던 고의가 아니던 내가 한 행동으로 인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 그 결과에 대해서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자신에 대한 참회가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적 설명이나 핑계 이전에 철저한 자기반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다소 정치적이지만, 매우 개인적으로는 백선엽은 과오보다 업적이 큰 사람 같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자기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설명과 핑계가 더 많았다. 그래서 그의 영웅적 행위가 그의 친일 행적 아래 빛바래졌다. 그 자신 스스로 법적으로 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일반묘역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면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과 위로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존심 강하고, 업적이 뚜렷한 사람이 가장 하기 힘든 행동이 철저한 자기반성과 스스로를 내어 놓는 용기일 수 있다.


 다소 정치적이지만, 매우 개인적으로는 박원순은 평가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죽음 직전까지 공적으로 일했던 삶을 살펴보면,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고 싶은 세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동의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몹시도 싫어했다. 하지만 그의 공적인 삶은 그의 마지막 행적 아래 빛바래졌다. 가족에게 미안했고, 자신을 믿어준 사람에게 미안했을 것이다. 또한 피해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 용기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존심 강하고, 명암이 뚜렷한 그는 스스로의 목숨을 끊음으로 자기반성의 형태를 취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고민했을까, 또한 피해자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들어할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일이기에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용기를 내어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고백하고 철저한 자기반성을 하였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한 개인의 위대한 성취도 단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무너진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나의 행위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법적 처벌과는 별개로 반성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나는 백선엽, 박원순 같은 삶을 살만한 깜냥도 되지 않지만, 이 시대의 종적을 남긴 사람들의 마지막 죽음을 둘러싼 논란을 바라보며 스스로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간다. 사람은 누구라도 과거의 행위로 칭송을 받을 수도 있고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사람은 그 행위를 자랑하기를 즐겨하고, 그 행위를 반성하기를 외면한다. 우리가 외면한 반성(또는 회개)이라는 두 글자를 깊이 새겨야 한다.


 다소 정치적이지만, 매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두 사람은 과오보다 업적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반성”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 두 사람이 던진 화두는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살아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역사도 흘러간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스스로 돌봐야 하는 삶이 요구된다. 그런 면에서는 나는 행운아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이렇게 소시민적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내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희생시키거나 피해 주지 않아야 한다. 되도록 함께 (또는 더불어) 행복한 삶을 열어가고 싶다. 나는 오늘부터라도 나를 반성하며, 나를 지켜며 살아가야겠다.


P.S 과거 반성이 없이 오늘, 미래의 행복이나 성장을 얘기하는 사람이나 집단(일본)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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