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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Aug 26. 2020

이솝 우화 : 해와 바람

설득의 기술, 해님에게 배우다.

 살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일도 많고, 설득할 일도 많아진다. 또한 나도 설명을 들을 때도 많고, 설득을 당하게 될 경우도 많다. 하지만 사람들은 설명과 설득 두 사이에서 자꾸 방황한다. 설명한다고 해놓고, 설득하기도 한다. 또한 설득을 한다고 해놓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서로 싸운다. 어떤 사안을 두고 어떻게 해석할지에 따라서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요즘에는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세상이지만, 이전에는 확증편향이라고 해서 내가 믿고 싶은 생각을 받쳐줄 증거들을 찾기 마련이다.


 회사에서도 설명할 일이 많아진다. 20~30년 동작하던 기계가 고장이 났다. 누구나 다 아는 원인이라면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다. 하지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명확한 원인을 찾기가 어려워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계부품, 제어장치, 피로파괴, 휴먼에러 등 다양한 원인의 요인을 분석하고 설명을 한다. 각 부서마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기계 부서는 전기원인이라는 설명을 하고 전기부서는 기계 원인이라는 설명을 한다. 이쯤 되면 설명을 하는 건지 설득을 하는 건지 진정 헛갈린다.


 그나마 기계가 고장 나는 일은 납득할만한 증거가 나오면 설명이 대체로 쉽다. 하지만 사람에게 어떤 가치관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은 보다 고차원적인 일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어제 아내가 보내준 “문에게 보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편지”라는 기사를 읽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법인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를 주제 삼아 설명을 하며, 상대방을 설득하는 수사적인 에세이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봤으면, 무슨 말을 할까? 평생 아테네를 위해 살았지만, 아테네 시민이 되지 못했던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집값보다는 한 국가의 폐쇄성과 경직성이 결국 아테네를 멸망으로 이끌지 않았을까 하는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를 주제 삼아 얘기하지 않았을까?


 난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법까진 모른다. 하지만 어린 시절 수없이 들었던 이솝우화는 알고 있다. 지나가는 행인의 옷을 벗기려고, 바람님이 열심히 강풍을 불어낸다. 한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증거를 기반으로 설명을 한다. “회사가 어렵다. 경기가 어렵다. 이번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희생을 해야 한다. 일본, 중국 사이에서 기업을 하기 위해서는 혁신이 필요하다.” 등등 믿음직한 설명을 쏟아낸다. 하지만 지나가는 행인은 거센 바람에 옷을 더욱더 여미고 만다. 바람님은 남을 변화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설명과 설득이라는 무기로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싶지만, 쉽사리 사람들은 자신의 옷을 벗기려는 바람에 맞서 더욱더 옷을 꽉 주고 걷는다.


 이때 해님이 등장한다. 해님은 지나가는 행인에게 강력한 바람 대신 자신의 열기를 뿜어낸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보여준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장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보여준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설득하려고 하는지 단숨에 알아챈다. 특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도를 믿습니까?”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대번 알아채고 만다. 상대방에게 설명과 설득 대신에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내 삶을 드러내 보이면, 사람들이 내 삶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옷을 벗어던진다. 세상에는 끝없는 수사학적인 레토릭이 넘쳐난다. 하지만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의 레토릭으로 사람을 설명하고 설득하기는 정말 어렵다. 오히려 이솝우화의 해님처럼...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남을 변화시키기보다는 내 삶을 변화시키면 자연스레 상대방도 내 삶을 보며 따라 할지 모른다.


 설명과 설득은 내 머리와 입으로 하는 일이지만, 내 삶을 변화시키는 일은 내 심장과 손발로 하는 일이다. 난 내 손과 발이 부지런한지, 부끄럽지 않은지 성찰해본다. 혹시 해님이라고 착각하면서, 내 삶에서 이상한 악취가 나지 않는지 반성해본다. 남을 변화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를 변화시키는 일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나를 변화시키면, 남도 변화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편지를 쓰기 전에 이솝 우화를 다시금 읽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해님인지, 바람님인지 스스로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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