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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Aug 24. 2020

일, 사람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사안의 경중으로

왜 나는 일을 해야 하는가

 내 인생 최고의 작가를 손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1등은 알랭 드 보통이다. 특히나 그의 처녀작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몇 번이고 읽어도 새롭게 읽힌다. 그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생각을 철학과 연계해서 썰을 풀어나가는 기막힌 재주가 있다. 그의 글쓰기 영향을 받아서인지, 내 글도 알랭 드 보통의 글과 비슷한 구석이 좀 있다. 물론 그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그 사람 글쓰기 스타일에 받은 건 엄연한 사실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직장인, 사업가 버전이 바로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작품인데, 이 작품도 꼭 일독을 권유한다. 머리를 싸매고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 코로나 19로 집에 머물러야만 할 때 시원한 에어컨을 쐬며, 읽기에는 정말 적격인 책이다. 최근에 직장인 17년 차이자 팀장 4년 차로 접어들면서, 과연 회사에서 일한다는 건 무엇인지.. 고민이 많다. 또 왜 나는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도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상투적이고, 사춘기적인 질문은 바쁜 일상 속에서 새벽이슬처럼 찰나처럼 사라진다.


 목요일 출근해서, 직장 동료들이 하는 얘기를 옆에서 듣다가 열폭을 했다. 내가 나설 일도 아니고, 나에게 맡긴 일도 아니었지만 왜 도대체 일을 그렇게 뭉개는지? 일을 하는 것보다 책임을 회피하는 게 중요한 일인 건지? 무수히 많은 물음표 앞에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300ml 생수 한 병을 벌컥벌컥 마시고, 다른 부서 부장을 찾아갔다. 그 일이 내 일도 아니고, 그 일의 책임과 권한이 1도 없는 제3자 였지만 도저히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그 날 저녁, 직장동료와 치맥을 했다. 직장인 17년 차 슬럼프에 빠져서인지, 아니면 40대 중반 중년의 객기 때문인지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중진국의 함정에 빠진다더니, 나는 중년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20~30대보다 안정된 삶을 살아가나, 예전과 같은 열정, 지력, 체력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50~60대와 같은 관록, 여유, 통찰력은 생길 리가 만무하다. 뭐랄까.. 그래도 확실한 건, 내가 인생의 변곡점에 서 있구나..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상승, 퇴보, 유지할 수 있구나.. 이런 생각에는 점점 확신이 들었다.


 나는 직장에서 소위 “일”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기업의 조직문화에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상당수 조직사회는 “일”은 높은 사람이 시키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높은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보고서로 정리하고, 어떻게 실행하느냐도 무척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일”만 하다 보면 조직은 수동적으로 변해버린다. “일”은 사람이 시켜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 그 자체로 생겨나기도 한다. 그러면 “일”을 누군가가 발견하고, 정리하고 이를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일은 사람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처리되고 있다. 상무, 부장, 팀장이 시킨 일이 0순위가 되고, 고객이 원하는 일은 후순위가 되기 일수다. 또한 누가 봐도 긴급하고 중요한 사안은 “일”이 되지 못하고, 왜 내가 있을 꼭 그 “일”을 해야 하냐고 윗사람들이 덮어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지금도 이렇게 생각한다. “일은 사람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사안의 경중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아무리 신입사원이 내게 물어보는 일도 가벼이 여기지 않으려 한다. 또한 아무리 골치 아픈 일이라도 하더라도 꼭 처리해야 할 일이라면 윗 사람에게 일을 만들어서 얘기하려고 노력했다.


 왜 나는 일을 해야 하는가는 물음표가 아니다. 왜 나는 일을 해야 하는가는 내게 당위로서 주어진 명제이다. 그 명제를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건 직장인은 일을 통해서 돈을 받는다. 그리고 회계장부에는 인건비, 노무비로 계상되고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면 대개 제조원가에 포함된다. 그러면 일을 통해서 회사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성장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인 셈이다. 그런데, 그 일이 누군가 시킨 일이 되면 중요해지고, 누군가가 시키지 않는 일은 아무리 사안이 중요해도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왜 나는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명제 앞에서 나 또한 자유롭지도 못하고, 떳떳하지 못하다. 하지만 나는 중년의 함정 앞에서 머뭇거릴지 언정, 결코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열폭하고,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서 설득하고, 여전히 현장에 나가서 발로 뛸 것이다. 내가 회사를 바꿀 수는 없어도, 내 스스로 멈추고 포기하는 일은 바꿀 수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라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다시 하루를 시작해본다. 왜 나는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언젠가 꼭 소설 한 편을 쓰고 싶다. 알랑 드 보통에게 헌정하는 오마주를 꼭 완성하고 싶다. 이제 다시 업무시간이 다가와서 “일”을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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