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윤식 Feb 07. 2016

스핀오프 - 어느 직장인의 글쓰기

(부제 : 생각, 한 다스 만큼의 자유)

내 이럴 줄 알았다. 애초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왜 그런 줄 이 글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40대 초반의 직장인이 브런치를 왜 시작했을까? 왜 나는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새벽 5시에 일어나 글을 쓸까? 애초에 유명한 작가가 될 능력도 없거니와 설령 그런다고 해도 유명세를 타고 싶진 않다. 요즘은  새벽뿐만 아니라 저녁에도 짬짜미 글을 쓴다. 가장 큰 이유는 글쓰기를 통해서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머리 속 생각으로 남겨두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희미해지고 결국 잊혀진다. 생각들을 글을 옮기는 일들이 그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못 쓴 초고라고 해도 내겐 그 어떤 위대한 생각보다 더 값지다. 기록되지 않은 생각은 흩어질 수 있지만 기록된 글은 세상에 출산되어 하나의 생명으로서 살아간다.  


국민학생이었던 시절, 연필 한 다스(12자루)를 즐겨 사곤 했다. 다스란 말이 일본말이긴 하지만 여기선 그대로 쓰기로 하자. 연필을 깎고 꾹꾹 눌러서 일기를 썼다. 근데 연필이라는 필기도구 자체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느리다. 생각은 저만치 멀리 가고 있는데, 손으로 쓰는 연필은 속도가 느리다. 야구장에서 타자가 투수의 공을 치는 것을 보고 약 1초 후에 “딱”하고 소리가 난다. 왜냐면, 소리가 빛보다 느리기 때문이다. 빛은 초당 30만 킬로미터 속도로 우리 눈에 들어오지만, 소리는 초당 320미터로 우리 귀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생각은 이미 앞서 있는데, 연필은 뒤에서 줄줄 따라온다. 그래서 연필의 속도에 맞추다 보면, 생각들을 곱씹게 된다. 몇 줄 쓰지 않아도, 생각은 곱씹게 되고 피드백(되먹임)이 되어서 점점 탄탄해진다.


어린 시절 한 다스 연필을 사두고, 글을 썼다. 한 다스 연필을 다 쓰고 나면 한 학기가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다스만큼 쓰고 나면 더 배웠다고 느꼈다. 그래서 내 글쓰기는 연필 한 자루 쓰듯이, 글 한 편을 써낸다. 그래서 한 다스 분량만큼 엮어낸다. 생각은 연필 한 다스 만큼의 자유를 얻는다. 마치 한 다스 연필을 살 때 느꼈던 감정이 일어난다. 12자루 연필을 다 쓰고 나면 공부를 더 잘하게 될 거야. ‘이걸로 여름방학 숙제인 탐구생활과 일기를 써야지.’ 이렇게 생각의 나래를 펼친다.


내 글쓰기도 생각 한 다스의 만큼의 자유가 있다. 그래서인지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가장 행복하다. 막상 글을 다 쓰고 나면, 글이 맘에 안 들 경우가 십중팔구이다. 아니 십중십구가 절대 대다수이다. 하지만 그 생각을 글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연필 한 다스를 사지 않고, 새로운 학기를 시작할 수 없듯이 말이다. 


지금은 연필 대신에 맥북에어로 Pages에 글을 쓰지만 그래도 생각을 글로 옮기는 일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데 내가 쓴 글을 살펴보면, 내가 좋아하는 글과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글이 확연히 다르다. 예를 들어 ‘철 이야기’나 ‘나의 3대 음악철황’은 정말 생각을 수 백번도 했던 글들이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 글이다. 그런데 ‘사랑, 부부싸움 그리고 소수’나 ‘페이스북, 잠망경과 우산의 기로에 서다’은 정말 10분 만에 생각해서 30분 만에 쓴 글이다. 사람들은 후자를 전자보다 훨씬 좋아한다. 최근에 어느 직장인의 세상만사의 원 글보다는 스핀오프-응답하라 1988을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좀 아쉽긴 하지만, 세상사 그렇다. 뮤지션도 몇 년에 써낸 곡과 10분 만에 써낸 곡이 있을 수 있다. 대중은 후자를 전자보다 훨씬 더 좋아할 수 있는 법이다. 내게 허락된 건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을 좋아하게 만들 자유가 아니라 그저 생각, 한 다스 만큼의 자유이다. 내 생각이 고쳐지고, 묵혀지다가 비로소 글로 태어나는 순간에 행복하면 그만이다. 난 다른 사람들이 주는 위안과 칭찬보다 ‘한 다스 만큼의 자유’가 훨씬 더 좋다. 난 글쓰기에서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오늘도  뭉툭해진 연필을 칼로 깍듯이 생각을 깎는다. 이 순간만큼은 난 자유롭고 행복하다.


P.S 설날 연휴에는 휴재입니다. 설 이후에 뵙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가의 이전글 스핀오프 - 응답하라 198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