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윤식 Oct 21. 2021

뭐라도 해야지

아무것도 안 하는 최선보다 뭐라도 하는 차선이 낫다.

 일이 나를 따라다는 건지? 아니면 내가 일을 몰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타고난 성질 탓에 문제를 보면 풀고 싶은 호기심 때문인지 모르겠다. 쉬운 문제라고 쉬이 보지 않고, 어려운 문제라고 주들지 않아야겠다. 나에게도 군대 시절 트라우마를 안겨준 디피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나도 힘이 없다는 일개 사병이라는 이유로 방관자로 살아가진 않았는지 통렬한 반성을 했다.



1997년 5월, 경기도 양주에 있는 모 기갑여단(5759부대)으로 목포 출신 동기와 이등병 전입을 왔다. 전입 온날, 그날 점호 시간에 병사 1명이 탈영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온 부대 사병들이 부대와 인근 지역을 샅샅이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런 탓에 전입 온 신병은 3중대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병은 군대 내 가혹행위로 부대 밖으로 탈영은 안 하고, 부대 내에 숨어 있다가 그날 밤늦게 무서워서 내무반으로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병은 소리 소문 없이 타 부대로 전출을 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입 온 이등병을 한 달 동안 때리지도 괴롭히지도 않은 꿈같은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지나고 나니, 야간 경계근무시간에 하이바로 머리를 맞아도 보고, 저녁식사 후 탄약창고에서 선임 일병에게 가슴팍을 숱하게 맞았다. 나는 절대 선임이 되면 "때리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수없이 했다. 그리고 실제로 제대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후임을 때리거나 가혹행위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렇게 26개월의 군생활을 마치고, 제대를 하며 일반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제대하고 2주 정도 이후에 후임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다. 내가 제대하고, 1주 뒤에 다른 중대 사병이 탄약창고에서 목을 매어서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 후에 부대는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나 보고는 정말 운 좋게 제대를 했다는 씁쓸한 위로의 말을 전했다. 여전히 그 시절은 폭력이 난무하고, 인격적 모독이 만연했던 거 같다. 그리고 내가 있었던 3중대를 소회 하여 보았다. 나만 때리지 않았을 뿐, 나 대신에 다른 사람이 때렸을 수 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후임들에게 다른 건 내가 용서해도 같은 인격체를 가진 전우들을 때리거나 괴롭히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도 말 뿐인 부탁이었나 반성해본다.


이제 군 제대한지도 20년이 훌쩍 지났다. 군대로 대표되는 조직사회는 여전히 적자생존의 투쟁이 만연하다. 투쟁의 크기나 형태만 달라졌을 뿐이다. 물론 그 치열한 삶 가운데서도 우정과 사랑, 동료애가 솟아나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 조직의 리더를 맡고, 세상을 살아보니.... 디피의 조현철이 했던 말이 계속 떠오른다. 그 말은 내가 폭력을 견뎌야 했던 가혹행위 트라우마보다도 나를 더 괴롭게 한다. "뭐라도 해야지.." 그래야 세상이 바뀐다. 나도 실패하더라도, 좌절하더라도, 넘어지더라도 "뭐라도 해야"겠다. 아무것도 안 하는 최선보다는 뭐라도 하는 차선을 살겠다.


나에게 일이 쏟아지더라도, 내가 설령 일을 몰고 다니더라도 "뭐라도 해야지" 세상이 바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안락"을 느끼는 삶보다는 뭐라도 해서 "피곤"한 삶을 선택해야겠다. 그래야 뭐라도 한 그 일들이 되먹임(피드백)되어서 세상을 조금씩 바꾸지 않을까 한다. 내겐 세상을 바꿀 만한 거대한 동력이나 영향력은 없다. 하지만 내 주변을 바꿀만한 말 한마디, 행동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오늘도 "뭐라도 해야지"

작가의 이전글 달고나와 카라멜 마끼아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