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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May 15. 2023

다시 보는 노팅힐, Recover

Surreal, but nice

최근 한 달가량을 맥이 빠진 채 살았다. 바쁘게 사는 것 같고, 딱히 기운이 처질 일이 없건만 반복되는 삶이 무료해졌다. 이제 나에게도 중년 남성이 겪는 초기 갱년기 증상이려니 자조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넷플릭스에서 무심코 찾아보게 된 “노팅힐”이란 영화를 지난주에 무려 3번을 봤다.


그 영화를 처음 본 건, 1999년 가을이었다. 군에서 제대하고, 평일 낮에는 8시간 이상 운전, 배달을 하며 번 돈과 주말 과외를 하며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때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가장 싼 방법을 찾다가, 남포동 남포문고 서점에서 발견한 “이스라엘 키부츠”에 대한 책을 읽고 실천에 옮겼다.


서울에 있는 키부츠 코리아에서 인터뷰도 하고, 천지항공여행사로부터 경유 2번 하는 항공권을 발권했다. 그렇게 내 생애 첫 해외여행 겸 해외도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 첫 번째 경유지였던 나리타 공항에서 출발해서 런던 히드로 공항까지 가는 비행기에서 기내영화로 “노팅힐”을 처음으로 봤다. British Airways를 탄 덕에 한글자막도 없이 “노팅힐”을 봤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 남단에 있는 키부츠 농장에서 금요일 안식일 밤에 키부츠 거주인들에게 무료로 보여주는 극장에서 다시 “노팅힐”을 봤다. 그리고 함께 나와 같이 키부츠에 왔던 내 친한 친구와 함께 유럽 배낭여행의 목적지로 “런던 노팅힐”을 선택했다. 그리고 약 100일 정도 이스라엘에서 키부츠 농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해외체험(?)을 마치고 2000년 1월부터 약 한 달간 유럽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아테네, 로마, 프라하, 파리, 런던을 돌며 친구와 함께 단 둘이 배고프지만 낭만적인 유럽 배낭여행을 했고, 공항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노숙도 해보고, 콜로세움이 보이는 어느 공원 벤치에 앉아서 싸구려 와인병을 플라스틱 컵에 마셔가며 아직 피지 못한 젊음을 탓하고 즐기며 유럽을 배회했었다.


그리고 런던 노팅힐에서 유명한 영화촬영지인 ”서점“에도 가보고, 주말에 들썩이는 골동품 가게에도 가보며, 아직도 피가 끓는 청춘으로 낭만을 소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40대 후반이 되어서 그 영화를 3번이나 보고 나서 점점 나의 무기력은 사라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는 낭만을 믿었고, 우정이 영원한 줄 알았고, 하루에 6시간 이상 걸어도 지치지 않았다.


여행 중 돈이 다 떨어져서, 한국에 겨우 연락이 닿아서 파리 외환은행 지점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약 20만 원 정도의 “프랑스 프랑”을 송금받았다. 외환은행 지점의 직원이 매우 불쌍한 눈초리로 얼마나 두 명의 남루한 대학생을 쳐다보았는지 기억이 난다. 그리고 2시간 정도 걸쳐서 송금이 되는 과정을 보며, 돈을 뽑아서 빵집에 가서 바게트 빵을 샀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본 “노팅힐”은 낭만을 믿는 20대 초중반의 대학생이었다. 아마도 지금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요인은 “이제 더 이상 낭만을 믿지 않는 나“였는지도 모른다. 영화에 보면, 휴 그랜트(윌리엄 태커 역)가 줄리아 로버츠(애나 스캇)의 프러포즈를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휴 그랜트는 자신이 다시 한번 더 상처를 받으면 Recover 되지 못할 거라는 이유로 프러포즈를 거절한다.


나도 그랬다. 내가 최근 얼마간 슬럼프에 빠져서 무기력하게 지낼 때.. 나는 이제 더 이상 “낭만을 믿지 않는 내“가 되어 있었고, 넘어질 걸 두려워하며 “Recover”를 걱정하는 소심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20대에 봤던 노팅힐을 40대에 다시 보게 되니, 나에겐 그 “낭만”을 다시 꿈꾸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영화 대사에 “Surreal, but nice”라는 표현이 있다. “비현실적이지만 좋다.”라는 말인데, 나에게 지금 꼭 필요한 말이었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일들이 나에겐 현실이자 낭만이 될 수 있는 차고 충분한 이유이자 증거이다. 그래서 잠시 매너리즘에 빠져서 깊은 슬럼프 수렁에 빠질 뻔했던 나를 다시 Recover 하게 만든 ”노팅힐“이 다시 더 좋아졌다.


난 오늘도 “Surreal, but nice”한 하루를 살아야 한다. 오늘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여기가 바로 ”노팅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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