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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Mar 01. 2016

소설로 써보는 한동대 이야기 #3

3편. 20살, 가로 접힌 사각 색종이

종종 8살 아들 녀석이 열심히 하는 종이접기를 도와줍니다. 사각형 색종이를 반을 접어서 폈습니다. 가로로 길게 줄이 그어진 색종이를 바라보며, 1995년 3월을 떠올렸습니다. 제 인생 만 40년의 시간의 종이접기를 생각했습니다. 제 인생의 가운데에 그어진 20살의 기억, 한동대 입학식을 다시 끄집어냅니다. 이제 2016년 신입생들이 들뜬 마음으로 학교에 입학하겠죠. 1995년 2월 말에 미리 학교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받았습니다. '한동' 밖에 없던 기숙사엔 아직도 마무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기숙사 1동 건물 앞에는 진흙 투성이었습니다. 비가 오면 진흙이 신발 밑바닥에 들러붙어 다들 3~5cm 키높이 신발을 신은 우스운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95학번 동기들에게 가운데로 길게 접혀 있는 종이 접기와 같은 사건을 얘기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41살 적지 않은 나이의 무게로 살아가는 알록달록 사각 색종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내 동기들을 위해  이 글을 바칩니다. "동기들아,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날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 영화 국제시장 인용 -


3편. 20살, 가로 접힌 사각 색종이 (부제 : 1995년 3월, 그 시리도록 그리운 추억)


1995. 3. 7 한동대 1기생 입학


김호길 총장과 김영길 총장.. 두 형제 박사가 꿈꾸던 실험은 1995년 3월 한동대 1기생이 입학하면서 2탄이 시작된다. 형의 1탄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대한민국 대학 역사에 거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동생의 2탄 실험은 아래와 같은 3가지 작전으로 수행된다. 


1. 첫 시작이 중요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당시 한동대 지원자격이 있었다. 그 당시 수능 15% 이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방에서 출발한 신생 사립대치고 꽤나 겁 없는 조건을 걸었다. 그 당시 대학 정시에 총 3가지 군이 있었다. 가군에 속해 있는 대표 학교가 포항공대, 나군에는 서울대, 연고대 등 70~80% 이상의 대학들, 다군에는 홍익대, 한양대, "한동대"가 있었다. 한동대는 명문대학의 대명사인 스카이대와 정면승부는 피하는 대신 예전 한양대가 "후기 서울대"로 유명했던 것처럼 스카이대나 국립 지방대 수준의 학생들이 "세컨드 초이스"로 선택되길 바랬던 것 같다. 


1995년, 3월에 1기 학생들이 400명 들어왔다. 정확한 통계를 내기 어려우나 10~20% 내외는 소위 스카이 붙고 들어온 학생들.. 50~70% 는 스카이에 매우 근접한 학생들.. 나머지 10~20%는 국립 지방대와 동급인 학생들.. 통계는 정확하진 않지만 한마디로 정리하면 "교수"들도 사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고, 신생 지방 사립대에 입학한 "학생"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나도 솔직히 좀 놀라웠다. 도대체 어떤 애들이길래 아무런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지방 신생대학에  지원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나중에 학교를 다니면서 교수님들의 수업을 들으면서 들었던 얘기 중에 하나가 "교수들도 실력과 믿음을 겸비한  학생들이 많이 와 주기를 기도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너무 놀랐다"라고 했다.


나도 짧지 않은 나이를 먹는 동안 느끼는 점은 신앙은 없다가 있어질 수 도 있고, 뜨겁다가 식어질 수 도 있지만.. 실력은, 아니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공부는 계속 잘했던 놈은 계속 잘할 가능성이 크고 못했던 놈은 계속 못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다. 왜냐면 공부라는 건 기초적인 "지능"에 일정 수준 이상의 "노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결코 한방에 잘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동문이 글을 올린 걸 봤다. 신생 한동대가 초기에 자리잡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초기 Input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의견이었다. 내가 1기라서 그런 거 절대 아니다. 1기에 만약에 소위 수능에서 중간대 성적인 20~30% 합격자가 대부분이었다면 한동대는 제 아무리 좋은 학습여건을 꾸민다고 해도 소위 실력이 있다는 대학의 클래스에 들지 못할 것이다.


2. 애들은 누가 가르치나?

김영길 총장은 자신의 주변을 도울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포항공대가 초기에 설립될 무렵, 김호길 박사는 자신이 대학교수로 있던 "메릴랜드 대학" (워싱턴 DC 근처에 있는 메릴랜드 주립대학) 대학교 출신 교수로 자신의 진용을 짠다.  그중에 한 명이 차후에 총장이 된 박찬모 교수도 있다.


김영길 총장은 시골 한동대에 그의 실험을 동참할 사람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온누리교회에 출석하는 여러 교수를 섭외하기 시작한다. 내가 알기론 초기 한동대 교수들 중에서는 상당수가 온누리교회 출신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고 있던 카이스트 교수들이나 카이스트 출신 교수들을  하나하나씩 섭외한다.  그중에 대다수는 "창조과학회" 회원이었다.


김영길 총장은 온누리교회, 카이스트, 창조과학회 출신들로 그 진용을 짠다. 아마 초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교수 중에 대부분은 3가지 출신 중에 하나이다. 그렇게 김영길 총장은 자신의 실험에 동참할 동역자를 하나하나 설득하고 불러 모았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봐라. 나도 이제 나이가 41살인데, 그 당시 교수들이 나이가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이었던 사람이 많았다. 누가 포항 시골에 기독교대학이 생긴다고 선뜻 가겠나.. 지금이야 한동대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스갯소리로 한동대 다닌다고 하면 "안동대"랑 헛갈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포항에 대학 갔다고 하면 다들 "포항공대" 간 줄 안다. 왜냐면 한동대 올 실력이면 공부를 영 못하지는 않았으니 포항에 있는 대학에 갔다고 하면 다들 "포항공대" 간 줄 아는 것이다. 


지금의 난 그 당시 교수들이 희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 95학번 동기들은 교수님들이 위대한 비전을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했다. 부와 명예도 다 있는 자리에서 한국 교회의 희망이라는 위대한 비전을 위해 그런 것쯤 헌신짝처럼 버리고 학생들을 "어여삐" 여겨 한동대에 오지 않았다. 30대 후반, 40대 초반이면 사실 그렇게 감성적으로 휘둘릴 나이가 아니다. 난 교수들이  희생했다기보다는 김영길 박사가 실험하고자 하는 그 대학에 "참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는  "희생"했다기보다는 "동참"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들의 위용도 어느덧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P.S1 20살, 가로 접힌 사각 색종이를 폅니다. 어떤 이는 종이학이 되어 누군가의 "희망"이 되었고, 어떤 이는 종이배가 되어 누군가를 실어나르는 "소망"이 되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던, 1995년 3월 그 시리도록 그리운 추억입니다.


P.S2 왜 입학식을 3.2일이 아니고 3.7일에 했을까요? 입학식과 동시에 학교 준공식을 같이 했습니다. 학교 공사가 3월 초에 맞추지 못하고 계속 늦어지다가 3.7일에 와서야 공사가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3.2일에 입학식 한 게 아니라 3.7일에 입학식과 준공식을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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