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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Mar 05. 2016

소설로 써보는 한동대 이야기 #4

4편. 아무도 쓰지 않은 도화지, 무엇을 쓰던 그림이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비가 온다고 봄이 빨리 오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지난주 만해도 전국에 함박눈이 내렸는데, 1주일 새에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세월이 빨리 가라고 재촉해도 시간은 빨리 가지 않고, 세월을 붙잡고 싶어도 시간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우산이 없으면 비를 맞기도 하고, 잠시 비를 피해 담벼락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세월이라는 비를 맞으며 살아갑니다. 봄비가 내립니다. 생명이 깨어나게 하는 봄비입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세월이 지나가는 소리도 함께 듣습니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렇게 봄비가 내리고 세월은 지나갑니다.


4편. 아무도 쓰지 않은 도화지, 무엇을 쓰던 그림이었다. 


3. 전통, 그런 거 없다. 우리가 만든다.


무언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어렵고 힘든 일이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거나, 새해가 시작되면 누구나 예전의 나쁜 버릇이나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스타트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담배도 끊어보기도 하고, 새해 목표를 거창하게 세운다. 


한동대가 생겨났을 무렵, 시도했던 여러 가지 제도들이 지금의 한동대를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명예제도, 순결서약식, Work Duty, 무감독 시험 등이 새롭게 시작되어 한동대의 "전통"이 된 케이스이다.


한동대가 여러 차례 자랑하는 그 유명한 "무감독 시험"은 국내 수많은 언론에서 보도해주었다. 다른 대학교 책상과 "참 이상한 대학, 한동대"의 깨끗한 책상을 비교하는 사진을 보여 주곤 했다. 그런데 난 한동대가 특별히 더 신앙심이 뛰어나고 순수한 학생들이라서 "무감독 시험"이 성공했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한동대는 두 남녀 학생이 아침에 식당에서 밥 먹으면 저녁에 커플이라는 소문이 퍼질 만큼  좁아터진 "폐쇄적이고 좁은 사회관계망 때문에 무감독 시험가 성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다소 냉정한 결론을 내고 싶다. 


같은 과라고 해봐야 50~100명 남짓 되는 학생들이 한 강의실에서 모여서 다들 커닝(치팅) 안 하기로 약속하고 시험을 친다. 소문이 금방 나 버리는 대학에서 다른 친구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책을 펴거나 쪽지를 가져와 몰래 보면서 시험을 보는 강심장은 그리 흔치 않다. 1명의 교수 감독자보다 동료 100명의 감시자가 더 무섭다. 


무감독 시험제는 제도의 시행에서는 맹자의 성선설의 입장에서 개개인의 양심이 선하다고 믿고 이 제도를 실험했지만, 결과론적으로 제도를 시행하다 보니, 그 제도를 지켜주는 메커니즘은 성악설의 입장에서 개개인이 서로를 감시하는 정죄 의식에 힘입어 정착되었다. 


20살 먹은 애들이 담배 피우고 술 먹는 게 무슨 대역죄나 된 양, 그 시절 철없는 나를 포함해 기독교 출신 학생들은 그들에게 "짐승"이라는 표적을 주었다. 정말 그랬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그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철없는 나를 반성한다. 담배 피우고 술 먹는 게 큰 잘못이 아니라, 그들을 죄라는 테두리에 묶어두고 난 다르다고 생각한 바리새인 같은 생각이 더 큰 잘못이었다. 


무감독 시험처럼 순결서약식이나 중세 수도사들이 하는 근로의무인 Work Duty가 한동대의 전통이 되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1호관 뒤쪽 천마지로 가는 길이 전부 다 포도밭이었는데 그걸 톱으로 죄다 자르고 친구들과 힘을 합쳐 목재를 나르고 그곳을 개간해서 밭을 만들고 씨를 뿌려서 배추랑 알타리 무를 심었다. 다 익은 채소들을 학생식당에 가져다주니 며칠 후 그 배추와 무가 반찬으로 나왔다. 


전통, 그런 거 없었다. 우리가 만들었다. 특별히 무감독 시험은 학생들의 실력을 일취월장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다른 학교는 당연히 있는 족보나 모범답안도 없이 우리는 그저 교수님들이 가르쳐준 대로 배우고 우리끼리 예상문제 만들어서 풀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과목은 "Open Book"으로 치러져 무감독 시험 자체게 필요가 없는 과목도 많았다. 책을 보고도 못 푸는 문제가 수두룩했다. 내가 본 시험 중에는 제한시간이 없었는데 6시간 넘게 본 시험도 있다.


전통은 때론 우릴 옥죄는 구습일 수도 있다. 박진영의 말처럼 "좋은 연습생은 나쁜 습관이 없는 흰 도화지와 같다"는 얘기처럼 흰 도화지 위에 하나씩 그려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좋은 전통이 만들어진 건 아니다. 그 과정에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P.S 이 글을 올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아들 민우에게 바칩니다. 누구나 새로운 시작은 설렙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그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듯이, 초등 1학년인 아들도 먼 훗날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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