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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Feb 06. 2017

게으름과 게걸음

오랜 게으름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변명

 다시 오랜만에 키보드 앞에 섰습니다. 일주일을 미뤄왔던 글쓰기가 몇 개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오랜 게으름에 대한 변명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난 바쁘니깐, 난 쉬어야 하니깐 적당히 둘러댈 수 있습니다.  요리사가 집에서는 요리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는 회사에서 매일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와 키보드를 끼고 살아가는 직장인이라는 핑계를 만들어 봅니다. 그래야 오랜 게으름에 대한 자기변명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듯한 변명일수록, 설득력이 있는 변명일수록, 그 변명 뒤에 내가 숨어버립니다. 변명하는 나보다 변명이 더 화려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글을 써야 할 절실함이 점점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새로 나온 '뉴 맥북 프로'를 사면 글이 더 잘 써질 것 같았습니다. 물론 새로 살만한 절실함이 없습니다. 게으름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은 "바빠서"였고, 게으름에 대한 솔직한 마음은 "절박하지 않아서"였습니다. 


 뮤지컬 김종욱 찾기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사실은 용기가 없어서 말을 못 한 게 아니라, 그만큼 절실하질 못해서 말 꺼낼 용기가 안 생긴 거더라고요." 나 또한 "용기가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라고 수 없이 많은 변명을 둘러댔습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변명 뒤에는 '절실하지 못한 내'가 있었습니다. 오랜 게으름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변명 뒤에 숨어버린 '내'가 있었습니다. 


 게는 옆으로 걷습니다. 앞을 바라보지만 옆으로 걸어갑니다. 내 삶이 그랬습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앞에 있는데, 내 삶은 자꾸 옆으로만 갑니다. 내 몸뚱이와 현실과 동떨어지게 내 눈만 치켜세우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봤습니다. 게가 앞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앞'과 '옆'을 구분할 뿐이지 사실 게에게는 '앞'과 '옆'이 동일할 수 도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앞과 옆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지만 게의 눈은 앞과 옆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오랜 게으름에 끝에 다시 글을 써볼까 합니다. 내 삶의 현실과 꿈이 다르다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앞과 옆이 다르다고 절망하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게걸음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오랜 게으름을 잠시 뒤로 하고, 게걸음을 떼어봅니다. 앞과 옆을 구분하지 않고 동시에 보고 걸어가겠습니다. 내 몸뚱이과 현실은 비록 내 눈높이와 다르게 살아가지만, 절실함을 버리지 않는 한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짧은 글로 브런치를 다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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