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일랜드가 선택한 길
드디어, 영도의 마지막 편입니다. 바로 시작합니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1980년대 명절 가는 길을 살펴보자. 아버지는 두 손 가득 짐을 챙기고, 어머니는 머리에 잔뜩 짊어지셨다. 나와 내 동생은 어머니 손을 잡고 부산 사상에 있는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2~3시간씩 남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서부시외버스터미널은 광주, 하동, 남해, 하동, 진주, 마산 등이 도착지로 출발하는 터미널이다. 그런데 유달리 남해로 가는 버스가 많았다. 하동 진교에서 우선 내리고, 그 다음은 남해대교를 건너서 남해읍이 최종 목적지였다. 내 친구는 거제도 장승포로 가는데, 중앙동에 있는 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거가대교가 생기고 나서는 거제로 가는 여객선은 운행중단되었다.
19세기 중반, 대기근으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아일랜드 사람들은 증기선에 몸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서 뉴욕 엘리스 섬에 도착했다. 20세기 중반, 1950~70년대에 남해, 거제에서 도시로 향했던 수 많은 청년들이 버스, 배를 타고 부산 사상시외버스터미널과 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다. 거제가 고향인 내 친구 아버지는 조그만 어선을 모시는 선원이었고, 나의 아버지는 주로 선박용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공장 노동자였다. 부산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 남해 사람, 거제도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았다.
그리스가 선택한 길과 아일랜드가 선택한 길은 매우 다르다. 그리스는 자국 도시내에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오니아, 북아프리카, 이탈리아로 가서 그리스보다 더 화려한 시라쿠스, 에페수스 등과 같은 도시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은 정말 먹고 살 길이 없어서 망망대해를 건너서 뉴욕에 도착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시라쿠스를 건설하면서 거기서 지배계층이 되었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은 뉴욕에서 주로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층민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분명 영도가 걸어온 길은 그리스의 그것과는 달랐고, 아일랜드의 선택 연장선에 있다. 돈을 벌어볼 요량으로 타지 생활을 한게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 타향살이를 해야 했다. 내 친구의 아버지, 내 아버지는 다른 고향 사람들과 결혼하지 않고, 거제사람, 남해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다지 밝지 않은 30W(30초라고 불렀다.) 백연전구 필라멘트는 끊어지기 쉽상이고, 백열전구 밑에서 밥상을 펼쳐놓고 네 식구가 밥을 먹었다. 꼭 빠지지 않은 밑반찬은 채를 썬 무와 함께 버무린 파래였다. 가끔씩 머리에 빨간 다라이를 짊어지고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할머니가 파시는 고등어가 밥상에 올라오곤 했다.
영도는 남항과 북항을 이어주는 물고기였고, 삼신할매와 고신대가 공존하는 섬이었다. 1950년 전후 부산은 북한을 떠나온 사람들이 냉면 대신 밀면으로 북한을 기억했던 실향민의 도시였다. 그리고 60~80년대 영도는 남해, 거제 등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살 길을 찾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영도는 부산이 꾸는 꿈이다. 바다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또한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어울려서 살아가는 공간이다. 달은 해가 꾸는 꿈이다. 영도는 부산이 꾸는 꿈이다.
과거에는 아일랜드의 선택이었지만, 앞으로는 그리스의 선택일 수 도 있다. 대한민국도 더이상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선택하는게 아니라, 개척을 위한 꿈과 다음 세대를 위한 문제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건 영도의 꿈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꿈이기도 하다. 취업할 곳이 없어 미국, 일본, 유럽으로 취업을 떠나야 하는 청년세대들이 다시 이 나라, 이 땅에서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이 나라에 꿈꿀 수 없는 미래가 없다면, 많은 청년들이 이 나라를 떠날 것이다. 이 나라에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있도록, 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꿈이 아직도 살아 숨쉬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P.S 일부 부산 사람, 그 중에 영도 출신 사람들만 공감할 수 있는 글이라 공감성이 떨어지는 점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