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내 손을 꼭 잡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일했기 때문에 마지막이 고통스러운 환자들을 많이 봤다. 그래서 항상 입버릇처럼 말한다. 자신에게는 절대, 목숨만 붙여놓는 식의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고.
아빠의 마지막 5개월 병원 생활은 엄마가 본 어떤 노인 환자들보다도 힘겹고 고통스러운 사례라고 한다. 가족들 마음이 미어질 정도로 아빠를 힘들게 한 시간이라, 아직도 우리는 아빠를 좀 더 편하게 보내줄 수 없었을까 속상해한다.
사랑하는 가족 치료 포기를 어떻게 이성으로 설득할까.
오늘은 시간의 순서로 기록하는 게 좋겠다.
오후에 일하던 중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병원으로부터 아빠의 상황이 많이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최악을 생각해야 할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 했다고.
마음의 준비란 연명치료를 말하는 거였다. 교수가 면담을 한번 하자고 했단다. 치료를 할지 말지에 대해 결정을 하라는 것이었다.
연명치료.. 최소한의 기계적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상태의 환자 목숨을 인위적으로 연명하게 하는 치료. 우리 아빠에게 그런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엄마는 마음을 어느 정도 정했다고 했다. 하지 않는 쪽이었다. 엄마와 나, 남동생 민수(가명) 이렇게 직계가족들의 동의가 있어야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역시 동의가 필요하지만 지금 할머니와 할아버지 건강도 좋지 않으셔서 동의 여부를 구하긴 어려운 상태다.
아빠 목을 뚫어 숨구멍을 낸 지도 한 달이 다 돼 간다. 2주 정도만, 숨 좀 잘 쉬라고 뚫어놓은 거라고 했는데, 병원에서 한 모든 조치들이 그랬든 목을 뚫고 아빠는 더 안좋아졌다.
아빠가 폐 이식 수술을 받고 나서 웬만해선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그날 아빠의 모습을 보곤 내내 울다 나왔다. 이전엔 아프다고 소리도 내고 말도 하고, 정신이 온전친 못해도 의사표현을 냈는데, 목을 뚫어서 목소리도 낼 수 없이 인상만 찌푸렸다. 아픔을 참기 위해 이를 꼭 깨물다 보니 이는 다 빠지기 일보 직전이다. 아래쪽 앞니는 허술하게 하나 남았고 입안 전체에 수포가 생기고 피떡이 졌다.
그날도 배가 아파 보였는데, 위에서 자꾸 피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치료 없이 맨날 약만 때려 넣으니 위가 남아나질 않는 거다. 온몸은 상처다. 발은 멍으로 시퍼런색이 돼버렸고, 어디서 피가 새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피부는 건조해 쩍쩍 갈라졌다.
퇴원이 상상이 안갔다. 그 치아로는 뭔가를 먹을 수도 없었고 내 팔뚝보다 얇은 허벅지로 걷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아프다는 말도 못한 채 고통스러워 하는 아빠를 보니, 그날은 계속 눈물만 났다.
그뒤로는 병원에 잘 안갔다. 코로나 때문에 들어갈 수 없기도 했지만 그 광경을 또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는 아주 잠깐씩만 들어갔고, 아빠는 늘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그러다 림프종 종양이 생겼다고 했고(검사로 확인이 필요하지만 검사를 못받는 상황이었다) 신장은 나빠졌다. 결국 신장이 망가져 혈액 투석을 받아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문제는 아빠에게 혈액 투석을 할 정도의 기운이 없다는 것. 의사들은 웬만하면 안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연명치료라니... 퇴근하고 집에서 멍하게 있던 내게 내과계 중환자실로부터 전화가 왔다. 혈액 투석을 당장 해야 하니 동의를 해달라는 거였다. 이렇게 급박하게 선택의 시간이 올 줄은 몰랐다.
동의한다고 했다. 한번도 안해볼 순 없었다. 엄마는 일 끝내자마자 병원으로 갔고, 10시가 넘은 시각 엄마는 나도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우리는 중환자실에서 한시간 반쯤 기다렸다. 한두번이 아니지만, 중환자실 앞에서 기다리는 건 정말 고역이다. 복도 대기실은 외과계 중환자실과 내과계 중환자실이 사이에 있다. 양쪽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의사가 보호자에게 와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하는 걸 그동안 여러번 봤다.
오늘도 우리 옆에 앉은 할아버지에게 간호사 한 명이 와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할머니에게 곧 심정지가 올 거 같은데 심폐소생술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상황이었다.
맞는 말이다. 가망이 없는 환자에겐 못할 짓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간호사가 무례하게 환자를 다그치며 할 소린 아니다. 적어도 팔짱을 낀 채 보호자를 내려다 보며 할 말은 아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숨을 어디로 쉬죠? 숨을 어디로 쉬냐고요. 폐로. 쉬잖아요. 그런데 폐가 다 망가졌어요. 지금 심폐소생술 하는 게 의미가 없어요. 다시 좋아질 가능성이 없다고요. 갈비뼈 다 부서지고 피투성이 되는데, 그거 보시고 싶으세요? 저희는, 보호자가 원하면, 하면 돼요. 원하세요?
그는 쉬지 않고 몰아쳤다.
간호사: "ㅇㅇㅇ교수님(아빠 수술 전담 교수 의사)도 다 예상하셨던 거였고, 그래서 몇개월 안남았다고 하신 거였고요”
할아버지: "(거의 안들리는 목소리로)올해까지는 살지 않겠느냐 했었는데…”
간호사: "그런데 그게 좀 앞당겨졌어요~~ 올해가~ 오늘내일이 됐어요”
할아버지: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 아니지.."
간호사: “간단하게 생각하라는 게 아니고 깊이 생각해보시라는 의미예요”
아, 하필 그 교수 환자구나. 그 교수 환자 중 살아나가는 사람이 없는 거 같네. 한 달 전에라도, 아니 일주일 전에라도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알려줬어야지. 왜 자꾸 곧 퇴원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하며 이런 저런 치료를 시켜놓곤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걸까. 난 정말 아빠가 걸어서 퇴원할 수 있을 줄 알았단 말이야.
마치 그 간호사가 우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있는 양, 엄마와 나는 간호사의 다그치는 목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 간호사가 일부로 쩌렁쩌렁 말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어차피 여기 앉아있는 중환자 보호자들 중 많은 수에게 다시 해야 할 소리일테니.
중환자실 간호사들은 죽음 앞에 누구보다 이성적이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번의 죽음을 마주한다.
하지만 거기 있는 가족들 중엔 내 가족의 죽음을 처음 겪는 사람도 있다. 그걸 조금이라고 헤아린다면 그렇게 행동할 순 없는 거다.
밤 11시 반쯤, 드디어 우리의 면회 시간이 왔다. 중환자실은 추웠다. 아빠의 손도 얼음장같이 차가웠으나 이불은 덮여있지 않았다. 왜 이불을 안덮었냐고 했더니 그럴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손엔 덕지덕지 바른 테이프들, 그 옆으로 건조한 살이 갈라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깟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닌 걸까.
아빠는 중환자실을 이미 너무 많이 들락거렸다. 3일만 내려갔다 와도 욕창이 생겨 왔다. 그 후유증과 상처는 계속 축적됐다. 목숨과 직결되는 중한 치료만 하겠다는 곳이 중환자실이지만, 정작 환자의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는 작지만 많은 변수들을 방치하고 있었다. 그놈의 욕창, 그거 하나가 환자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데…
매일 밤낮으로 찍어댄 엑스레이, 1월부터 매일 찍었으니 100번은 찍었을텐데, 그게 아빠의 종양을 키우는데 조금도 기여하지 않았을 거라 장담할 수 있을까? 아빠만 찍는 게 아니고 준중환자실에 있는 환자 4명이 모두 찍다 보니 400번은 노출됐을 거다. 물론 그거 찍는 동안 의사와 보호자들은 나가 있는다. 극소량의 방사선이라면서… 그게 환자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내가 증명할 방법은 없다.
아빠의 상황이 악화된 건 마지막 조직검사였다. 조직검사를 무리하게 받고 온 날부터 아빠의 컨디션이 악화됐고 그게 전신에 무리를 줬다. 환자에겐 딱 정해진 병명에 매칭된 치료법만 필요한 게 아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환자에게는 크게 작용할 수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기운 북돋아 주기, 다리 한번씩 굽혔다 펴주기 등이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작지 않다. 실제로 아빠는 엄마가 병원에 있는 동안 섬망 증세가 호전됐고, 정신이 돌아오니 몸도 좀 나아졌다. 보호자 유무는 환자 상태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면회는 15분 정도로 짧았고, 엄마와 나는 준중환자실에 가서 짐을 챙겨 나왔다. 원래는 아빠가 중환자실에 내려가면 준중환자실 자리와 양쪽으로 돈을 내며 자리를 빼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못돌아올 수도 있어서인지, 병원에서도 짐을 빼게 했다. 짐을 빼니 더 실감이 났다.
아빠는 지금쯤 투석받고 있겠지. 신장이 망가지면 투석을 받지 않곤 살기 어렵다고 한다. 간, 폐에 이어 이젠 신장이라니. 정말 끝을 보는 기분이다.
혈액 투석의 결과가 좋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엄마에게 연명치료 동의 여부를 다시 물었나보다. 어제 오후, 엄마는 아빠를 보러 병원으로 올 수 있겠냐고 전화했다. 마침 일이 빨리 끝난 김에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역시 아빠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줄줄이 피를 달고 있는 모습보다 보기 힘든 건 아빠의 치아 상태다. 입원한 이래 아빠는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이를 꽉 깨물었다. 앞니가 빠지고 곳곳에서 피가 나고 피떡이 혀와 입천장, 안쪽 볼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내가 아빠를 보고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빠의 입을 보고였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 입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정말 다행히도 아빠는 내가 온 걸 알고 있었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알아듣는 눈치였다. 내 말에 아주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잡으니 아빠는 바로 덥썩, 온 힘을 다해 꽉 쥐었다. 아, 오길 너무 잘했다... 난 이 순간을 아마 평생 못잊을 거 같다. 이틀 전만 해도 내 손을 잡지 못했는데, 이번엔 확실히 아빠와 인사를 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혼자 울면서 늘어놓고 나왔다. 근데 정작 ‘사랑해’, ‘고마워’는 못했다. 그것도 버릇이 된 사람들이 하는 말인가보다.
그리고 오늘, 엄마와 나, 재익이까지 함께 연명치료 중단 동의서를 쓰러 갔다.
이번 주치의는 다행히 친절한 사람이었다. 너무나 친절하게, 그러나 기계적이지 않게,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며 조심스럽게 아빠의 상황을 설명해줬다. 그리고 아빠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린 상태에서 가족들과 하루라도 시간을 보낼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래줬다. 우리가 원한 건 그거였다. 중환자실에서 조금만 나아지면 일반 병실로 가서 투석 없이 3일 정도 보내다가 편안히 가시는 것. 막상 중환자실에서 차도가 생기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욕심이 생길 거 같긴 한데,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의사 말대로 며칠만 아빠가 정신이 돌아온 상태에서 우리와 이별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오늘 아빠는 또 다시 정신이 없었다. 손도 잡아주지 않았다. 엄마와 내가 그렇게 떠들었는데,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주 간만에, 민수도 왔는데.
민수는 오늘 처음으로 아빠 소식을 들었다. 일 끝내고 병원에 와보니 엄마에게 듣고 많이 울었나보다. 후회가 많이 남을 거다. 아빠와 얘기도 별로 안하고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후회할 거 같아서 아빠와 시간을 더 보내야 니가 나중에 덜 힘들 거라고 여러번 말해주고 싶었는데, 내 성격이 또 이 모양이다. 나는 이미 3~4년 전 아빠 기침이 심상치 않은 걸 느끼고 이후 최대한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려 애써왔다. 그쯤부터 아빠랑 대화도 많이 했다. 그전엔 대화가 이어지질 않았던 거 같은데, 이후엔 아빠와 둘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정도가 됐고, 같이 드라이브 가거나 산책 다니는게 가능해졌다. 아빠에게 잔소리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도 친밀해졌다. 그래서인지, 나는 큰 후회가 없다.
민수에겐 이제서야 용기를 내 카톡을 보내놨다.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우리가 살갑고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부모님과 함께 살 맞대고 평생 살았다. 거의 매일 얼굴 보고, 밥 먹고, 잔소리 듣고 말이다. 세상엔 갑작스런 이별도 많은데 나와 민수는 그래도 부모님과 보낸 시간이 많다.
꿈처럼 실감이 안나던 5일이 순식간에 스쳐갔다. 10일과 11일은 병원에서 아빠와 가족들이 밤을 보냈다. 12~14일에는 삼일장을 치렀다. 젊은 아빠의 마지막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길 바라며 나름 애쓴 기간이다.
아빠는 10일 월요일 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올라왔다. 무리가 됐는지 혈압과 산소포화도가 각각 40, 60대까지 떨어졌다. 급속도로 떨어지는 기계판 숫자에 심장이 쿵쾅댔다. 요양병원에서 일한 엄마는 ‘이렇게 숫자가 떨어지다 순식간에 0이 되고, 그렇게 아빠가 하늘나라로 가는 거야’라고 했다.
(이날 일기는 이어가지 못했다)
4년이 흐른 아직까지도 홀로 중환자실 면회를 들어갔을 때 아빠가 내 손을 아주 꽉 잡아주던 그 순간이 생각이 난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듯 꼭 잡은 손이 나에겐 너무 강렬한 마지막 인사로 남아있다.
아빠는 아직도 내 꿈에 생각보다 자주 등장한다. 얼마전에는 멀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지난해 연말에 돌아가신 할머니와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나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말로 서로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게 많이 아쉬워서 우리는 자꾸 꿈에서 이야기를 나누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