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머리가 하얗게 샜다
엄마와 아빠는 고등학생 시절 처음 만났다고 한다. 엄마가 아빠를 많이 좋아했던 거 같다. 50대 중반이 다 되어서도 엄마는 아빠에게, 내가 보기엔 모든 걸 양보하고 살았다. 아빠가 아픈 뒤로는 더 그랬다. 지치지 않고 간병하는 엄마를 보며 저런 무한 희생의 동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항상 궁금했다.
거의 와상 환자처럼 2주를 지내더니 아빠는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
최근 아빠는 침대 생활만 했다. 방이 거의 병실이다. 엄마와 난 병수발을 든다.
오늘 병원에 갈 때도 부축하라고 화내며 가만히 있고, 늦은 밤 응급실 갈 준비를 하느라 다들 옷 챙겨입고 바쁜데 아빠는 끝까지 혼자 누워 있었다. 마치 미운 4살을 보는 기분이었다.
아빠는 아프기 전에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편이었다. 누워있거나, TV 보며 앉아있거나였다. 엄마가 어디 끌고 나가야 비로소 두 발을 써 걸었다. 밖에 나갈 땐 짧은 거리라도 차를 끌고 나갔다.
아빠의 폐는 아빠의 의지와 상관없이 딱딱해졌다. 그러니 더 움직이기 힘들었겠지.
아무리 그래도, 폐 이식 수술 후 지켜본 아빠의 모습은 대체 회복의 의지란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게을러 보였다. 내 목숨이 달린 일에 저렇게 의지가 없을 수 있나 싶었다.
나는 운동을 이틀만 쉬어도 다음날 출근을 걱정해야 할 만큼 허리가 좋지 않다. 이틀만 쉬어도 코어 근육이 말랑말랑해져서 앉아있기가 힘들다. 그래서 아무리 피곤해도 운동을 한다. 안하면 다음날 최악의 컨디션으로 부메랑이 돌아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몸은 정말 정직하다. 움직이는 만큼 되돌아온다. 무엇보다도 재능과 거리가 먼 게 의외로 운동이라고 하지 않나.
수술 후 내가 기대한 아빠의 모습은, 시간을 정해두고 하루 세끼를 건강히 쳉겨먹는 것, 그리고 조금이라도 팔다리 근육 운동을 하는 것 정도다.
병원은 아빠의 에너지를 많이 빼앗아가는 곳이다. 회복하기보단 더 움직이지 못한 채 나올 가능성이 크다. 비쩍 마른 팔과 다리에 언제쯤 살과 근육이 붙을 수 있을까.
엄마의 생일이 지나갔다. 생일 축하한단 말도 못했는데.
29일 금요일 저녁. 엄마는 밤 9시에 일을 끝내고 아빠를 보러 병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식자재 마트에 들려 미역국 재료를 살까, 말까,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고민했을 거다.
생일상 차리기 위해서라기보단 주말에 우리들 먹일 집밥을 해놓으려고 마트에 들러 장을 봤을 거다. 그렇게 엄마의 생일 아침 식탁엔 미역국이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간도 못보고 나가야 했다. 나에게 몇분 더 이따 가스불을 끄라고 시킨 뒤 병원으로 향했다.
토요일엔 간병인 아주머니가 쉬는 날이라 엄마가 밤을 새고 일요일 아침까지 있어야 한다. 사실상 생일 하루를 종일 병원에서 보내는 셈이다. 나도 잠시 다녀왔다. 한 30분 있었는데도 너무 피곤했다. 아빠 밥 먹이고 이닦이고, 그 모든 과정이 엄청난 체력을 요하는 중노동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생일이라는 건 알고 있을까. 눈에 힘도 없고, 아무 것도 생각할 기력이 없는 거 같다.
일요일에는 많이 아팠는지 엄마에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물었다고 한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고통스러운 병이 찾아온 것이 억울했나 보다.
그 말에 엄마는 가슴이 찢어졌을 거 같다. 아빠도 잘못이 없겠지만 엄마는 더더욱 잘못이 없는데.. 주말에 단 하루도 제대로 못쉬고 이제 일까지 그만 둘 생각을 하는 엄마를 보면 내 마음이 답답해진다.
병원에서 자고 일요일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집에 발을 붙이자마자 또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주치의가 급하게 엄마를 찾았다.
종일 라면 한끼 먹은 엄마는 또 미역국 맛도 못보고 병원으로 갔다가 밤 9시가 넘어서야 집에 왔다. 돌아와선 허겁지겁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게 전날 엄마가 끓인 미역국의 첫술이었다.
이러니 내가 집을 나갈 수가 없다.
엄마에겐 엄마의 공간이 없다.
일단 우리 집엔 엄마 방이 없다. 작지만 소중한 내 방, 베란다와도 이어지는 꽤 큰 민수(남동생 가명) 방. 그리고 가장 큰 안방은 아빠 거다. 우리는 각자 방에 틀어박혀 에너지를 충전한다. 그러다 한번씩 거실에 나와 뭘 먹거나 수다를 떨고, 또 다시 각자의 공간으로 들어가 혼자의 시간을 갖는다.
엄마는 거실과 주방에 머무른다. 주방도, 거실도, 엄마의 일터인 동시에 쉬는 공간이다. 그리고 거실 바닥에서 잔다.
엄마는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 모든 걸 하면서 동시에 TV를 본다. 엄마가 TV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아빠가 배고프진 않은지, 몸은 괜찮은지, 온 신경이 아빠에게 가있다. 운동하라고 잔소리하고, 우리한테는 과일 먹으라고 잔소리,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다.
최근 나는 안방을 아예 아빠의 공간으로 꾸며드렸다. 어차피 혼자 쓰시던 거 퀸사이즈 침대 말고 싱글로 침대를 바꿔드렸다. 침대가 너무 커서 아빠가 누워만 있나 싶어서 그랬다. 침대 옆에는 아빠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글씨 쓰기 연습을 할 수 있는 예쁘고 둥근 흰 테이블을 의자와 하나 놔드렸다. 의자도 하나만 놨다.
엄마가 오래 전에 1만원 정도 주고 시장에서 산 좌식 밥상은 아빠의 새 테이블에 밀려 구석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법전을 읽고 쓰고 기도하던 공간이다. 가끔 엄마가 거실에서 자지 않고 안방 바닥에서 자기도 했는데, 이제 그 공간도 사라졌다.
어제 친구 A에게 들어보니 A네 어머니도 집에 방이 없으시다고 한다. 안방은 아버지 거고 심지어 아버지는 서재도 따로 있다고 한다. 남은 하나는 오빠방이다. 어머니는 거실에서 주무시고 역시 방이 없는 A는 작은 이모 집의 남은 방에서 지낸다. 난 “그놈의 서재가 뭐라고”라고 했다.
우리 엄마도 일을 하고 A네 어머니도 일을 하신다. 엄마는 뒤늦은 나이에 일을 시작했지만, A네 어머니는 그 집의 가장처럼 일을 해오셨다. 돈을 벌어도 집에서 그에 걸맞은 부동산 지분이 생기는 건 아닌가보다.
엄마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새벽 5시30분 절에 간다. 아빠를 위해 기도 드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7시쯤 돌아와 나와 민수를 회사, 독서실로 각각 보내고 아빠 아침까지 차려놓고 약을 챙긴다. 11시에는 출근을 하고 밤 10시에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와선 또 아빠를 챙기고 거실에서 TV를 좀 보다가 그대로 잠에 든다.
아빠가 병원에 있을 땐 출근 전후 하루 두번씩 병원에 들린다. 주말엔 간병인이 집에 가야 하기에 엄마가 병원에서 잔다. 혼자 에너지를 충전할 공간도 없이 어떻게 매일을 기계 돌아가듯 살 수 있는지, 난 상상도 하기 싫고 정말이지 닮기 싫다.
내가 독립해서 집을 나가면 내 방을 엄마 방으로 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아빠를 돌보는 일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 될 거다. 그나마 5~10% 정도는 나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있었을 거고 감정적 의지는 그보다 좀 더 컸을텐데, 그걸 나눠질 사람이 없어지는 거다.
그래도 난 엄마의 공간을 만들어준단 핑계를 대고 온전히 독립적인 내 공간을 찾아 떠나고 싶다. 매일 갈등한다. 아빠가 병원에서 퇴원하면 나는 아마 더 그럴 거다.
생각해보니 엄마에게도 유일한 안식처 공간이 있다.
바로 절이다. 엄마는 매일 새벽 절에 간다. 사람이 없는 법당에 앉아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마음이 가장 편안해지는 시간이라고 한다.
한파가 찾아와도, 눈비가 내려도, 엄마는 꼬박꼬박 절에 나간다. 위가 자주 쓰린 나를 위해 직접 우려 낸 양배추즙을 절에 가기 전 내 방에 한컵 갖다주고, 이것저것 아침으로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고, 내가 기어코 먹기 싫다고 하면 그제야 그만두고 6시가 되기 전 집을 나선다.
집에는 존재하지 않는 엄마의 공간을 찾아나서는 것 같다. 엄마는 가족을 위해 기도하러 간다지만 나는 엄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확실히 절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몸이 건강해졌기 때문이다.
오늘 병원에서 엄마의 흰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엄마는 흰머리가 많이 났다며 걱정했다. 들여다 보니 정말 앞쪽이 하얗게 샜다. 그리고 며칠 새 머리는 더 하얘졌다. 위쪽 두피는 더 휑해졌다. 머리숱이 적은 게 고민이었어도 흰머리는 없었던 엄마였다. 최근 몇달 간 엄마는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걸까, 가늠도 되지 않는다.
코로나 때문에 병원 들어가기가 어려워졌는데 오늘은 간만에 아빠를 보러 갔다. 아빠는 약 기운에 눈을 치켜뜨고 허공에 자꾸 손을 휘저었다. 손을 꼭 잡아줘도 나를 쳐다도 보지 않고 눈을 위로만 치켜 떴다. 몸을 살펴봤다. 허벅지는 내 가는 팔뚝보다도 가늘었고 발에는 피가 덕지덕지 묻어 굳었다. 팔에 주사 바늘 꽂을 때가 없어서 발에도 주사 바늘을 잔뜩 꽂아두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보낸 4개월, 엄마와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병원이 환자를 환자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거다.
당연한 소리 같지만 지켜보는 가족 마음은 미어진다. 폐, 신장, 정신, 심장, 위, 돌아가면서 아플 때마다 새로운 검사를 한다. 검사를 하기 위해 금식을 하거나 약을 처방받는 것부터 아빠 몸엔 무리가 간다. 밑에 내려가서 힘든 검사를 하고 돌아오면 아빠의 상태는 굉장히 안좋아진다. 섬망이 심해지거나 어딘가에서 감염이 돼 온다. 그러면 약을 더 쓴다. 위가 견디지 못하고 위에서 피가 난다. 그에 맞는 처방이 또 생긴다. 고통을 잊으려는 걸까, 아빠의 섬망 증세는 더 심해진다. 아빠의 섬망 증세가 하루이틀이 아닌데, 병원은 또 섬망을 이유로 뇌파 검사를 해야 한단다. 뇌파 검사만 열번은 받았다.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검사만 한다. 아빠는 더 지쳐가고 안좋아지는데 병원비는 벌써 수천이 들었다. 엄마도 지쳐간다. 대체 언제까지 이 악순환이 반복될까.
벌써 5월이다. 엄마는 버틸 만큼 버텼다. 5월에도 아빠가 퇴원하지 못하면 어쩌지? 병원은 사람을 살려놓는 곳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드는 요즘이다. 실험 대상 같다. 나는 아픈 아빠를 10분 보고 나오는 것도 너무 힘든데 엄마는 매일 두번씩 들여다보고 주말엔 24시간 간병한다.
곧 일까지 그만둔다. 직장까지 그만두는 건, 엄마가 정말 아빠의 세계에서 살겠다는 의미다. 나는 그대로 일을 유지하는 게 엄마에게 좋을 거 같다고 설득하고 있지만, 이쯤되니 엄마에게 둘 모두를 하게 하는게 더 힘들 거 같단 생각도 든다. 일을 하면서 집안일과 아빠일은 쉬엄쉬엄 보란 의미였는데, 지금까진 어느 정도 가능했어도 지금은 아빠가 잠시도 엄마 없인 안된다.
방법을 모르겠다. 나는 그냥 1월쯤부터 내 일이 너무너무 힘들어서 의도적으로 외면해왔다. 너무 이입하지 않으려 했다.
근데 엄마까지 아플까봐, 요즘은 그게 두렵다. 어떻게 해야 엄마를 구할 수 있을까. 매일 도망치고 싶으면서 동시에 엄마를 빼내고 싶고, 엄마를 빼내려다 나도 함께 구렁텅이에 빠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