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하지만 다부지게

TAEK - 보내주오

by 재영
너와 눈이 마주쳤네요. 우주가 보여.
정말 우주는 무중력인지 확인해 볼까요.


"오빠, 할 이야기 있지 않아요?"


준호는 굳게 입을 다물었고, 언제나 그랬다. 애초에 이 선택적 우유부단함은 성장환경에 기인했다. 5남 3녀의 슈-퍼 다자녀가정의 맏이인 그는, 재물복이 자식복에 한참 모자란 가정형편 속에서 스물한 살 평생 자기의 기호를 내세울 수 없었다. 약주를 거나하게 걸친 아부지가 하-드를 사 오시는 연례행사의 밤에도, 동생들이 휩쓸고 간 비닐봉지 속 덜렁 남은 '비비빅' 하나 조용히 들고 뒷정리를 하던 그였으니까. '좋다', '싫다'로 기호를 표현하는 일은 준호에게는 고향인 부산에 내리는 눈만큼 흔치 않았다.


지은은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준호를 빤히 보았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 이 봉사동아리에 가입하러 갔을 때, 지은은 곰팡이 가득한 동아리방구석 어디선가 늦봄의 햇살만큼이나 묵직하고 포근하지만 정말로 강렬한 눈빛을 느꼈다. 그는 이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일 년 전, 그의 아부지가 병원 침대에서 시트보다도 더 창백한 손을 힘겹게 들고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마지막으로 보냈던 것과 같았으니까. 지은이 준호를 보았고, 준호가 지은을 보았던 그 일초에서 지은은 참으로 그리웠고, 슬펐으며, 기뻤다.


준호는 지은을 빤히 보았고, 그러지 않을 때에는 지은이 준호를 빤히 보는 한 달이 지났다. 원체 과묵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님도 보고 뽕도 따기 위해 들어오는 동아리에서, 봉사 외에는 전혀 흥미가 없어 보이던 둘이 동아리 MT에 따라온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놀랄 노자인 이벤트였다. 그러나 쑥덕거림도 잠시, 역시나 평소처럼 술도 잘 마시지 않고 분위기도 잘 못 맞추는 둘에게 사람들은 금방 관심을 껐다. 이미 다들 인사불성인 새벽 한 시, 지은이 준호를 다시 빤히 봤다. 이번에는 준호도 지은을 빤히 보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둘은 철저한 무신경 속에서 함께 밖으로 나갔고, 지은이 준호에게 대뜸 물은 것이다.


준호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지은은 아부지가 그에게 그랬듯이, 조용히 준호에게 손을 뻗고, 갑작스러워 굳어버린 그의 손을 가만히, 하지만 다부지게 잡았다. 준호의 눈빛이 그랬듯이, 그의 손 또한 당연하게도 아부지의 손과 같았다. 나이에 맞지 않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따뜻하고 우악스럽지 않은. 지은은 또 한 번, 그리웠고, 슬펐으며, 정말로 기뻤다.


"아부지가 이런 손을 가진 남자는 놓치지 말라고 했어요."


평소보다는 많이 술을 들이켠 탓인지 현실감이 없어진 준호였다. 그는 그저, 자신처럼 아버지를 '아부지'라고 부르는 깊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이의 손을 가만히, 하지만 다부지게 맞잡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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