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 위에서

14년의 디자인을 내려놓고 마주한 전환

by 유정

꿈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붙잡았다.
“디자이너 그만둬도 되겠어? 정말 진심이야?”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응. 이젠 미련 없어.

지쳤고, 정이 다 떨어졌어.”


눈을 뜨고 나서도 한참이나 그 장면이 남아 있었다.
그 꿈 덕분에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디자이너라는 이름에 더는 미련이 없다는 걸.




새로운 일을 찾기 시작했다.
급여는 낮지만, 대기업 계열사라 복지가 탄탄했고
무엇보다 정년이 길다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이력서를 냈고, 다행히 면접 기회가 주어졌다.
면접 날, 면접관은 물었다.


“왜, 14년 동안 해오신 일과

전혀 다른 일을 하시려는 거죠?”


나는 준비된 마음처럼 차분히 대답했다.
“디자이너는 프로젝트성 업무가 많습니다.
회사도 대부분 에이전시나 하청 구조라
계약이 끊기면 다른 일을 맡거나 회사를 옮겨야 하는데

이제 안정적으로 오래 일하고 싶습니다.”


언젠가부터 일이 창작이 아니라 소모처럼 느껴졌다.

클라이언트의 요구는 끝이 없었고,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새로운 불안이 시작됐다.

내 손에서 나온 디자인은 내 것이 아닌 듯,

그저 소비되고 사라졌다. 그렇게 반복되는 순간마다, 나는 조금씩 정이 떨어져 갔다.




20대, 30대 초반에는 이런 변동이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움이 주는 자극이 좋기도 했다.
하지만 30대 중반을 지나며, 업계가 점점 젊음을 선호하는 걸 뚜렷이 보게 되었다.


선배들의 얼굴에 늘어난 주름과, 자리에 대한

불안함이 묻은 무거운 한숨을 지켜보면서

나의 미래 또한 겹쳐졌다.




사실 디자인을 특별히 사랑해서 선택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잘했고, 쉽게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티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오래 갈 힘은 아니었다.


이제는 다르다.
새로운 일 앞에서 또 다른 능력이 자라는 걸 느낀다.
처음이라는 두려움 속에서도
나는 충분히 잘 해낼 거라 믿는다.


나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아왔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안정적인 삶을 원한다.

어쩌면 그것이 또 다른 자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