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 마니아들 사이에서 번진 것은 얼마나 되었을까? 내가 이 말을 처음 접한 것은 한 애니메이션이었는데, 그곳에서는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조력자가 말했다. 구원이라는 것은 없어, 네가 멋대로 구해질 뿐이야. 그 애니메이션에서 처음 나왔을 리는 없으니 배경이 된 문화를 추측해보건데 아마 손 놓고 도와달라 아우성 치는 사람들에게, 너 스스로도 노력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가 그 뿌리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마법이나 기적이 일어나서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사르르 해결해 주는 것이 구원일까? 그렇다면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 맞다. 왜냐하면 세상에 마법은 없고 기적은 우연의 연속에서 발산되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구원받았다’는 대개 명확한 대상이 있다. 그것이 신이든, 사람이든, 하다못해 소설책이든 구체적인 대상에게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례 상, 구원은 특정 대상이 행한다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인식이라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지각과 경험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견해를 접목한다면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개인의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소방관이 불 속에서 사람을 구하거나 배고픈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을 주듯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구한다’가 아닌, 처지나 상황으로부터 근본적으로 구원한다는 것은 처지나 상황을 해석하는 개인에 따라 그것을 구원이라 느낄 수도, 참견이라 느낄 수도, 더 나아가 방해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구원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인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사용되지만 ‘구원해달라’는 두루뭉술하게 표현된다. 현재 상황을 타개시켜 달라는 말을 할 뿐이다. 바라는 대상도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아 상상의 존재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고, 특정 인으로 연결될 경우에는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에 빠지곤 한다. 사이비 신도나 집착과 같은 것이 그 발로이다. 즉,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는 사람은 없지만 받는 사람은 있으며, 미래가 아닌 과거에만 존재한다.
말하건데, 구원은 모든 일이 끝난 후 자신이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구원이란 모든 사건을 겪고 내가 느낀 후에서야 비로소 그것이 구원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회상하는 것이며,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다. 구원이 존재하냐 그렇지 않느냐로 명확히 나누어야 한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구원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개인은 주변의 배려와 사랑을 통해 살아가고, 큰 불행을 맞닥뜨렸을 때 도와준 사람이 늘 있기 마련이다. 그저 유행을 따라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면, 주위의 사랑을 빛 바라게 하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