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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유이 Apr 09. 2024

나의 불행을 위로받기

수동이 아닌, 능동

누구나 불행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불행을 숨기고 살아간다.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를 천천히 톺아본 사람은 찾기 쉽지 않다. 불행은 상대적이라는 말도,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도. 오직 자신에게 한정되어 반복해 생각할 뿐 타인에게 깊이 감동하는 경우는 잘 없다.


‘불행은 상대적이라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사람에게 힘들다면 그건 그만큼 힘든 거야.’


이 말은 자신이 아니라 남에게 해야 하는 말일 것이다. 마치 ‘애가 그럴 수도 있죠.’라는 말이, 아이 그 자신이나 아이의 부모가 아니라 아이 탓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말할 때 그 가치가 빛나는 것처럼. 어린 애를 혼내면 아동학대라는 말을 말썽을 피운 아이가 아니라 그걸 지켜보던 어른이 해야 하는 것처럼. 많은 말에는 숨겨진 전제가 존재한다. 그 일부를 잘라내 자신의 멋대로 가공하는 것은 오히려 상대를 모욕하는 일이 된다.


나도 힘들어. 이 말이 갖는 무게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서도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생긴다. 글도 그렇다. 같은 글을 쓰더라도 누가 썼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감명을 준다. 이제 막 한글을 배우는 어린 아이가 쓴 ‘산은 산 물은 물’과 고승이 읊조린 ‘산은 산 물은 물’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얼마 전, 친구에게 깨끗한 흰 종이에 글자를 써서 보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친구는 멋들어진 솜씨로 받아 써 사진 파일을 보내주었지만, 사진이 너무 어두워 본래 바라던 흰 색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였고, 얼마 안 있어 새로 찍은 사진과 함께 친구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미안. 집이 어두워서 이게 한계야.”


그 말을 들은 나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알았어, 고마워. 그렇게 보내곤 새로 보내준 사진을 편집하여 종이를 희게 바꾸었다. 내겐 올해 들어 가장 슬픈 말이었다.


불행은 상대적일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내 불행을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리고 또 그 이야기를 밤 새도록 들어주면서도, 심지어 스스로도 그것들을 모두 인정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모두가 나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니. 모든 불행은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모두가 나같아지기를 바라다니.


이제 나는 불행이 상대적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을 말로 꺼내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내가 가진 불행은 너무도 작은 것이었다. 그런 내가 불행이 어쩌고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초라하고 하잘 것 없어 보이게 되었다. 이제 내가 힘들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나날들이 부끄러워서 숨고 싶다.


불행. 우울. 불행은 그저 불행이고 우울은 그저 우울이다. 그에서 의미를, 의도를 부여하는 순간 내가 가진 이야기는 왜곡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알 수 없는 것일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 수 없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말하려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잔잔한 아픔이 있다. 사랑이 그랬듯 불행도 그렇다. 사랑해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무엇인지 발견해 내야 하듯, 불행 역시 스스로 위로해달라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고 위로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도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위로해준다는 것은 전형적인 구원 서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가능한가? 이에 대한 내용을 목요일에 이어서 작성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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