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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Aug 06. 2020

뉴욕의 경제는 월 스트리트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메리카 기행 - 뉴욕 10

월 스트리트에는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다. 골목이 워낙 좁은 데다 고층 건물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기 때문에 하루 종일 그늘진 데가 많다. 그래서 언뜻 보면 무더운 여름날 걸어 다니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잠깐 쉬어갈 카페 하나 마땅치 않은 이곳에선 그저 길이 끝날 때까지 걷는 수밖에. 다행히 월 스트리트는 몇 블록이 채 안 되는 짧은 구간이었고, 중간에 나타난 연방 홀 앞으로 광장처럼 펼쳐진 곳에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여기가 바로 뉴욕증권거래소와 월가가 만나는 세계 금융의 중심이자 뉴욕 경제의 시발점, 파이낸셜 디스트릭트(Financial District)이다.


뉴욕에 본격적으로 물자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600년경 대항해 시대에 네덜란드가 진출해 오면서부터이다. 당시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던 페터 미노이트(Peter Minuit)는 원주민으로부터 60길드(약 24달러)에 맨해튼을 매입하고, 이름을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이라 지었다. (이 거래는 역사상 최고의 빅딜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 지역과 주거 지역을 구분하기 위해 벽을 쌓았는데, 이것이 바로 월 스트리트(Wall Street)의 기원이다.


그 당시 암스테르담 시민들은 옵션, 선도 거래, 호가, 리스크, 작전 등 현대의 증권가에서나 쓰이는 용어들을 줄줄 꿰고 있을 정도였다. 1602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되면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이 회사 주식을 팔아서 대박을 친 사람도 쪽박을 찬 사람도 흔했다. 주식투자는 17세기 암스테르담의 국민 스포츠였다.

- 로데베이크 페트람의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중


대항해 시대의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로 증권거래소가 세워질 만큼 유럽에서 금융 산업이 발달한 나라였다. 그들은 항해에 대한 위험 부담을 분산시키기 위해 증권을 발행하고, 만약 항해가 성공하면 투자자들에게 수익이 돌아가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보험 계약, 채권 발행, 주식회사 설립 등 금융 활동에 필요한 제도적 기반도 마련해놓았다.


그러던 중 아메리카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영국과의 전쟁이 발발했고, 결국 네덜란드가 패하면서 뉴암스테르담은 영국이 점령하게 된다. 섬 이름은 당시 왕위 서열 2위였던 요크 공작의 이름을 따서 뉴욕(New York)으로 개명되었고, 네덜란드인들이 세운 방어벽도 철거되었지만 월 스트리트라는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 비록 영국의 손에 넘어갔지만, 과거 네덜란드인들이 마련해놓은 금융 기반 위에 물자와 사람과 돈이 오가면서 이 일대는 금융의 중심가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 후 경제 대공황과 블랙 먼데이, 2008년도의 세계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본사가 미드타운이나 뉴저지로 이전되었지만, 월가의 명성은 여전히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강렬하게 박혀 있다.

위 사진의 정중앙에 있는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같은 건물이 연방 홀(Federal Hall National Memorial)이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취임 선서를 낭독했으며, 또한 미국 헌법의 기초가 되는 권리장전을 발효시킨 역사적인 장소이다. 험한 바닷길을 건너온 이민자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법제도 정비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동시에 이곳에서 파생되는 경제적 번영도 그들이 이룩해야 할 또 다른 이념이었는데,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사진 왼쪽에 성조기가 걸려 있는 뉴욕증권거래소(New York Stock Exchage)이다.


주식알못이지만 이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 <월 스트리트>와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주식 중개인의 괴물 같은 삶을 대충은 짐작해 볼 수 있다. 개봉한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두 영화 모두 1980~90년대에 활약했던 주식계의 큰손 고든 게코와 조던 벨포트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메시지는 섬뜩하다.


그들은 종이조각을 보며 갑부라 생각하겠지.
우리 중개인은 진짜 현금(수수료)만 챙기면 되는 거야.


그들의 삶은 편법과 불법으로 얼룩져 있다. 거기에 정법은 없다. 사실 찰리 쉰과 디카프리오라는 명품 배우가 나오지 않았다면 영화를 끝까지 보기 힘들 정도로 내용이 역겨웠다. 그들이 고객에게 추천한 우량기업의 정보가 제대로라면 그렇게 괴로워하고 마약과 섹스로 일탈했겠는가. 주식이라는 건 그 기업의 성장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투자를 함으로써 투자자도 함께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투자에도 명분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

월 스트리트 끝에서 맞물리는 브로드웨이(Broadway)를 따라 배터리 공원 쪽으로 내려가면, 뉴욕 증시 상승의 아이콘 Charging Bull이 나온다. 미국 증시에서 황소의 뿔을 치켜드는 모습은 상승을, 곰이 앞발로 내리치는 모습은 하락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황소의 불알을 만지면 돈복이 온다는 설 때문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날 하루 종일 사람들 손에 불알을 저당 잡힌 황소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쯤 돈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 황소의 불알은 언제쯤 자유로워질까...

황소 너머로 엄청나게 높은 마천루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2001년 9.11 테러로 무너진 쌍둥이 빌딩 대신 세워졌다는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One World Trade Center)이다. 한 극단적 무장 세력이 저지른 테러는 미국과 해당 단체를 넘어서 민족과 종교와 이념을 아우르며 전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 사건 이후로도 오랫동안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의심받고 상처받고 희생되어야 했다.


하지만 세계 경제를 이끄는 미국은 마냥 슬퍼할 수 없었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지어진 곳은 예전의 쌍둥이 빌딩 자리가 아니었다. 미국은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뉴욕에서 제일 높은 마천루를 세우고, 쌍둥이 빌딩이 있었던 자리에는 9.11 테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Ground Zero라는 사각 공원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둘레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모두 새겨 넣었다. 인간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와 세계 경제의 중심지는 더없이 어울렸다. 그라운드 제로에 흘러내리는 물은 희생자들을 위해 흘린 눈물이라지만 나에게는 생명으로 보인다. 두 개의 채워지지 않는 풀은 그렇게 생명과 희망을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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