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중국의 수도 북경 이야기를 꺼낼 차례.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북경은 너무나도 방대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과연 그 시작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막막한 두려움과 동시에 영화 <마지막 황제>와 <패왕별희>의 애틋함이 곳곳에 깃들어 있어 생각만으로도 설렘이 가득한 까닭이다.
나는 이런 북경을 처음에는 출장으로, 그다음에는 온전히 자유로운 몸으로, 3번째는 부모님을 모시고 방문했는데, 각각 나름의 명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제일 아쉬운 건 출장으로 왔을 때였다. 회사에서 경비를 들여가며 보내준 거라 자는 것이나 먹는 것, 타는 것이 모두 평소보다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호화로웠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끌려다녔던 기억밖에 없으니. 그래도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어서 만리장성과 용경협 등 외곽에 있는 명소들을 공금으로 다녀온 덕분에 혼자서 왔을 땐 시내 쪽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고, 그 후 부모님을 모시고 왔을 때에는 시내와 외곽을 적절히 섞어서 루트를 짤 수 있었다.
북경 시내는 천안문 광장을 중심으로 웬만한 볼거리가 밀집되어 있다. 천안문 광장 위아래로 서울의 4대문처럼 커다란 문이 하나씩 있는데, 위쪽의 천안문을 통과하면 그 유명한 자금성이 나오고, 아래에 있는 전문(옛 정양문)을 통과하면 명청 시대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전문대가가 펼쳐진다. 그리고 자금성 옆으로 2블록 정도 걸어가면 옛 왕가의 우물이 있는 왕부정이 나오는데, 지금은 크고 작은 백화점이 들어서서 거대한 쇼핑지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거기서 다시 1블록을 더 이동하면 몽골로 가는 국제열차를 탈 수 있는 북경역이 나온다.
중국의 심장 북경, 그중에서도 최고의 중심은 바로 '금지된 도시'라 불리는 자금성(紫禁城)일 것이다. 15세기 명나라의 영락제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이래 마지막 황제 부의까지 명과 청대에 걸친 두 왕조와 24명의 황제가 거쳐간 곳. 그러니 한마디로 중국의 중세와 근대사를 주름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그는 또 수많은 뜰을 건너가야 한다.
그 많은 뜰을 다 지났다 해도 새로운 계단을 만나게 되고,
다시 뜰을 지나고 또다시 다른 궁전을 만나게 된다.
끝없이 몇 백 년, 몇 천 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황제가 파견한 사절은 결코 그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 프란츠 카프카의 '황제의 전갈' 中
카프카의 단편 '황제의 전갈'은 자금성에 간다면 꼭 읽고 가기를 추천하는 책이다. 숨통이 끊어져가는 황제의 전갈을 받은 보잘것없는 신하가 자금성을 지나가는 과정을 단 두 페이지에 걸쳐 표현해놨는데, 그 여정이 마치 하나의 소우주를 헤매는 것과도 같아서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몽롱한 분위기에 빠져든다. 과연 자금성은 그런 곳일까? 유럽도 아닌 중국의 자금성을 나는 카프카적으로(kafkaesk) 여행할 수 있을까?
아주아주 넓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역시 그 광범위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평일의 이른 아침에도 매표하고 입장하는 데만 1시간이 넘게 걸렸으며, 입구에 있는 그림 전시관과 도자기 전시관을 건너뛰고, 동육궁과 서육궁의 구조가 같다고 하여 한쪽만 돌아봤음에도 성 안에서 무려 5시간을 헤매야 했으니. 정말 카프카의 소설처럼 소우주를 한없이 떠돌다 겨우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의 거대함은 두 번째에서는 사그라드는 걸까?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방문했을 때에는 화려하기 그지없던 태화문은 더 이상 예전의 느낌이 나지 않았고, 거대한 태화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볼품없는 중화전과 보화전은 거의 스킵하면서 지나가다 보니 외정과 내정을 구분 짓는 건청문이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다. 그리고 내정이 시작되는 건청궁부터는 규모가 확실히 줄어들어서 교태전과 곤녕궁을 지나 금방 어화원에 이르렀는데, 기이한 암석과 수목으로 꾸며진 어화원의 한쪽에는 옛 스타벅스였던 카페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2000년부터 7년 동안 이곳 '금지된 도시'에서 미국의 커피 맛을 선보였던 스타벅스. 결국 대륙의 민족주의에 밀려났지만, 혼자 왔을 때에도 가족들과 함께 왔을 때에도 이상하게 여기서는 꼭 커피를 마셔보고 싶었다. 비록 내부는 한없이 비좁고, 커피 맛도 중국 특유의 탄 맛이 났지만, 고풍스럽게 디자인된 탁자에 앉아 옛 황제의 정원을 바라보며 커피 한 모금 들이키는 그 시간이 참으로 좋았다. 이것이 스타벅스의 매력인 것 같다. 그 지역에 스며드는 공간과 디자인과 분위기가 커피 맛을 뛰어넘어 소비를 하게 만드는 마력.
지금은 이 카페 대신 신무문 쪽에 고궁각루카페(故宮角樓咖啡)라는 이름의 화려한 카페가 입점했는데, 명청대의 두 왕조가 거쳐간 만큼 메뉴에 황제의 이름을 넣는다든가 심하게 중국스러운 화폭으로 인테리어된 내부가 조금 과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도 충분히 그들의 카페에서는 메뉴를 보는 것도 주문을 하는 것도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Americano를 '아메리카노'라고 부르지 못하는 나라에서 그냥 밀크티도 아닌 '삼천가려밀크티(三千佳丽奶茶)'를 주문해야 하는 외국인의 불편함을 고려하긴 한 것일까? 그런 이유로 앞으로 이 카페의 행보가 궁금하기는 하다.
자금성을 나와 천안문 광장(天安门广场)에 들어서자 시간이 명청 왕조에서 갑자기 중공 시대로 훅 건너뛴 느낌이다. 현재의 중국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라고 해야 하나. 광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하도를 건너야 하고, 각각의 입출구에 있는 보안검색대에서 철저하게 점검을 받아야 하니. 어떤 공안은 물병의 물을 마셔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 광장으로 빠져나오면 인민의 영웅인 마오쩌둥을 기리기 위한 기념당과 인민영웅기념비가 상징처럼 우뚝 서 있는데, 기념비의 정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人民英雄永垂不朽.
인민영웅은 영원불멸이다.
이 글귀를 읽고 있으니 문득 홍위병과 문화혁명이 떠올랐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에서 일어난 구시대 타파 혁명, 줄여서 '문혁'이라고도 하는 이 혁명은 어려서 이념이 제대로 서지 않은 어린 학생들을 선동하면서 무서운 속도와 방향으로 퍼져갔다. 그 결과 현대판 분서갱유와 중국판 홀로코스트로 수많은 지식인이 핍박받았는데, 펑지차이의 <백 사람의 십 년>이란 책에서는 그 시절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해놓았다.
잔인하다는 것은 온갖 방법을 다 생각해 내서
풍부한 창의력으로 사람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10년이지만, 백 사람이 모이면 어마어마한 시간일 텐데, 그게 단지 100명뿐이었을까. 저자인 펑지차이는 문혁이 사그라들던 1980년대 중반, 그 시절의 경험담을 공모하는 광고를 신문에 냈고, 4천 통이 넘는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중 100개의 사연을 추려서 신문에 연재했는데, 그중에서 다시 29편의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 바로 <백 사람의 십 년>이다. 제목에서부터 많은 것을 알려주는 이 책은 역사서에 단 몇 줄로 요약된 사건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그 후발로 2차례에 걸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바로 천안문 사태이다.
그런 격동의 세월을 품은 천안문 광장에서 중국의 현대사를 생각한다. 이제 천안문 광장은 그 어느 곳보다도 보안이 강화되어 겉으로는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를 향한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 같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우한이 봉쇄되었을 때 '의사 리원량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세계적으로 충격을 주었고, 중국 당국에서 아무리 입막음하려 해도 꿋꿋하게 국가망을 뚫고 진실을 알려주는 시민기자까지 생겨나고 있으니. 예전에는 '문화혁명'이 있었다면, 지금은 '4차 산업 혁명'에 발맞춘 또 다른 혁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천안문 광장에서 전문을 통과하니 다시금 명청 시대의 분위기가 그대로 재현된 전문대가(前門大街)가 펼쳐진다. 명과 청은 중국 왕조 중에서도 경제와 문화가 특히 발달한 시대였으며, 건축 양식도 그에 걸맞게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는데, 특히 유교 사상과 가부장 제도로 인해 몇 대에 걸쳐 가족들이 함께 모여사는 문화가 정착되면서 가옥의 규모 또한 방대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사합원(四合院)이라고 하는 정원을 둘러싼 사각 형태의 집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며, 이 사합원의 형태가 여러 개 모여 대단지를 이룬 것이 바로 자금성이다.
하지만 이 오랜 역사를 지닌 관광테마도시에는 이런 고급진 면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이로 난 골목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보면 요우티아오를 튀기고 전병을 굽는 노점상과 마작 삼매경에 빠진 어르신들을 꽤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니. 가끔 말을 걸어오는 동네 할아버지한테 "팅부동(못 알아들어요)" 하면 마음 좋게 웃어주기도 하신다.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삶의 현장, 그래서 북경의 중심부가 참으로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