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라는 범주를 설명하는 철학자 아도르노(Adorno)의 서술에서 주목해볼 만한 특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전 글에서 첫 번째 특징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두 번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둘째로는, 아도르노는 숭고 논의를 '자연미', '역사성' 개념과 관련지으면서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자연미'란 보편적 개념성에 포섭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실체로 한다. 즉, 그것은 자연에 대해 막강한 것으로 대립하여 등장하는 시대에는 논의될 수조차 없었던 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미를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연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배력을 행사한 것이며, 나아가 자연이 더 이상 인간에게 위력적인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을 인간 자신이 깨달았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위력적인 자연 앞에서도 그것에 압도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의식을 통해 더 고양될 수 있다는 숭고의 경험에 대한 칸트의 언명은 그러한 사태를 표현하고 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칸트의 숭고 경험은 주체가 자신을 자연적 부분과 정신적 부분으로 '구분'하여, 위압적인 자연 앞에서도 자신의 정신적인 측면을 인지하면서 자연에 앞서는 정신의 우월성을 깨닫는 경험이었다. 아도르노는 그를 통해 칸트의 숭고 경험이 다음의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즉, 인간 정신이 주체성을 확립하는 과정과 자연으로부터 인간이 거리를 두는 과정은 서로 필연적이지만, 그 지점에서 역설적으로 자연과 인간이 얽혀 있다는 점, 즉 서로 매개되어 있다는 실제적인 조건성의 상태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자연과의 분리를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했으나, 자신의 우월성 특히 이성이 무한성을 표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이미지도 결국 자연의 무한한 모습으로부터 도출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표면적으로 비역사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자연미 개념은 핵심에서부터 역사적 개념이라고 보았다. 자연물에 대립하는 인공물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문화경관은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자연미 개념-즉, 자연스러운 것-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자연을 경험한다는 것은 매개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자연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을 경험한다는 것에는 실제로는 전체 사회가 얽혀 있다. 즉, 사회는 지각의 도식들을 사회 내의 인간들에게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사회가 대조와 유사의 기제를 통해 견주어보면서 그때그때 마다 특정 대상이 자연미에 속한다고 미리 못 박아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미에 대한 경험은 인간이 자연과의 대결을 통한 주체성을 확립했음을 전제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경험이다.
자연과의 대결을 통해 주체성을 확립한 주체는 가속화되는 문명의 진보로 인해 더 이상 자연을 마주하면서 두려움에 휩싸이거나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쾌적함을 느낀다. 즉, 자연의 위력에 견줄 만큼 자신도 무한한 존재라고 상정하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 앞에 마주했을 때 진정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계기는 자신의 지배권이 한계가 있다라는, 일종의 낯설고 다른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계기는 인간의 기형화된 메커니즘으로 인해 인간 주체에게는 외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