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 결혼기념일

우리의 8번째 결혼기념일

by 에센티아

어제는 8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여느 평일날처럼 평범하게 지내다가, 저녁 식사 후 케이크에 초를 밝히고 세 식구가 나누어 먹으며 조촐하게 보냈다. 화려한 꽃다발이라거나 샴페인 같은 겉치레는 기름 빼듯 쏙 빠져버렸다. 대신 나는 인터넷으로 그동안 사고 싶었던 원피스를 한 번에 대량 구매했다. 장바구니에만 담아두고 살까 말까 했던 것을 한 번에 다 질러버렸던 것이다. 딱히 입고 나갈 곳도 없는데 사면 뭐하나 싶던 옷 들이지만, 일단 사고 보니 기분이 썩 좋다. 역시 행복은 Flex 인가!!



결혼 8년 차,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이제 너무도 현실적이기만 하다. 작년까지는 비싼 레스토랑을 예약하거나, 호텔에서 하룻 밤을 묶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굳이 어딘가 단둘이 여행을 다녀온다거나 하는 노력도 해보았다. 하지만, 올해는 남편도 나도 왠지 그런데 돈을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서로 간에 통했던 것 같다. 차라리 그 돈으로 그동안 아끼며 사느라 마음껏 질러보지도 못 했던 것들이나 사고 싶다는 실용적 마음이 한구석에서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그래서 지난주부터 돈을 쓰기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늘 가계부를 정리해보니, 한 달 지출의 1/3이 다 지난주에 나간 것 들이었다. 이런 대박!


'로맨스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은 역시나 돈이었던 것이었어!'


라는 진정한 삶의 본질을 다시 한번 여실히 깨닫게 된 것이었다. ㅎ



지출 목록을 살펴보니, 나는 평소라면 벌벌 떨며 손이 도저히 나가지 않던 고급 위스키와 코냑 등의 술과 원피스를 구매했다. 남편도 일 년에 도통 옷 한 벌을 사 입지 않는 짠돌이인데, 지난주에는 일 년 치 입을 옷을 다 샀다. 그렇게 Flex를 해주고 나니, 정작 결혼기념일 당일에는 돈을 더 쓰고 싶지 않아졌다. 케이크 하나 달랑 사서 덕담을 주고받으며 실속 있게 먹어치웠다. 사실상 우리 부부보다 8살 아들내미가 더 주인공인 양 재미를 봤다. 마치 지 생일 파티인 것처럼. 그러고 보니, 너도 우리 결혼식에 주역으로 참여하긴 했다. (뱃속에 있었으니,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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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하얀 눈이 축복처럼 펑펑 내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나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버진 로드를 걸었다. 지금은 꿈처럼 아득한 그날이 평범한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떠올리기엔 너무도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진다. 벽에 걸린 결혼사진 속 나조차 지금의 나에게는 전생처럼 낯설기만 하다.



아 현실이란 참으로 무디고 무심한 것이로구나!


오늘날 100년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그깟 로맨스나 뜨거운 사랑 따위가 대체 뭣이란 말인지. 기껏해야 2,3년 바짝 들끓는 미친 열정을 위해 2,30년을 오로지 그 기조에 얽매여 살았던 나날들이여. 마흔에 와서야 돌아보니, 남녀 간의 로맨스란 피식 헛웃음이 나기도 하고, 참 부질없다 싶은 생각도 든다. 거친 세상을 애 키우며 살림 꾸리며 살아가야 하는 보통의 중년 생활인으로서 이제는 메마를 대로 메말라버린 탓일까?



그래도 아직 여물지 않은 촉촉한 영혼들에게는 로맨스의 세계가 삶의 목적이자 전부일 테고, 나 역시 어떻게든 빛바랜 기억이라도 부여잡고 꾸역꾸역 살아내야만 할 테다. 내가 그 관문을 일단 통과했다 해서 다른 이들에게까지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나는 이미 20년 전에 수능을 이미 끝냈지만, 지금도 수많은 고3들은 그 시험을 치려고 또 수험생활을 겪어내야 하는 것처럼. 잠깐 앓는 열병과도 같은 것입네 어쩌네 아무리 해봤자, 그건 뒷방 노인네의 쓸데없는 첨언일 뿐, 당사자들에게는 생생하게 현재진행 중인 인생의 전부이자 팬데믹이다!



내 사랑과 로맨스가 사라져 버렸다거나 영영 끝나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성격이 변했다.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에서 세로토닌과 엔도르핀 쪽으로 갔다고 하면 될까나. 지금 내 사랑은 흥분되고 설레이고 짜릿한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졌다. 대신 엄청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고, 그야말로 건강하다. 지금 내 로맨스는 내 몸과 라이프스타일에 꼭 맞고, 실용적이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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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예전과 같은 설레임과 두근거림, 열정 같은 기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을까?



솔직히 나는 이제 싫다. 늙어서 그런가 그 과정을 다시 겪기는 귀찮고 거추장스럽다. 이제 이 마흔의 몸뚱어리와 외모를 가지고 실전에서 벌어지는 로맨스 영화에 다시 출연 제의를 받는다면, 전혀 뛰어들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이 든다. 그러느니 차라리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편을 선택하련다.



최근 '아웃랜더'라는 영국 로맨스 드라마를 넷플릭스에서 정주행 했는데, 밤을 새워 볼 정도로, 젊은 시절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더 깊은 몰입과 대리만족을 만끽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역시 로맨스의 허전한 구멍은 결국 드라마가 메꾸어 주는 것이로구나! 그 옛날 왜 그토록 일본 아주머니들이 욘사마에 열광하며 돈을 쓰고 다녔는지 얼핏 알 것도 같았다. 아무에게도 해 끼치지 않는 플라토닉적 로맨스의 대리만족을 통해 충족될 정도의 것이라면 굳이 실제로 내가 경험할 것까지야 뭐.



결국 사랑도 긴긴 삶의 맥락 속에서는 정신승리가 아니면 지켜낼 수 없는 과업과 맨탈의 영역이 아닌가 싶다. 아직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참 슬프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린 시절 들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아들이 사랑에 눈 뜰 나이가 된다면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다. 굳건하고 건강하게 다져진 부부의 사랑이야말로 정말로 최강의 사랑이라고. 그리고 그때는 그때대로, 지금은 지금대로 빛깔만 다를 뿐 사랑은 언제나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을 주고 힘을 가지는 것이라고. 이런 얘기 하면 또 2,30년 사신 분들이 더 살아보고 얘기하라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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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살아가게 될 40년, 우리 부부의 사랑은 또 어떤 삶의 여정을 거치며 진화를 거듭해나가게 될까? 40년 넘게 함께 해오신 부모님들과는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해 있지 않을까? 그런 우리의 사랑을 우리 아들은 또 어떻게 기억하게 될는지.



그래도 결혼 10주년에는 올해처럼 실용적인 거 말고, 거하게 뭐라도 하나 기획해보기로 마음먹는다. 발리에서 비치 웨딩 한번 하던지! 물론 그때쯤엔 여행도 자유롭게 다시 다닐 수 있겠지...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8년을 한결같이 함께 해준 내 소울 메이트, 엽오.



아 내년엔 뭘 Flex 하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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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념일 남편에게 쓰는 편지

https://blog.naver.com/yubinssk82/22144940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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