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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센티아 Feb 10. 2021

아이 낳고 산다는게 이런건지 몰랐지?

수지타산이 한참 맞지않는 폐업 불가능한 업이 있다면

아들이 일곱 살이 되던 해, 더이상 나는 집안을 유아적 인테리어로 해놓고 살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아이가 다칠까봐 온 집안에 깔아놓았던 매트도 다 걷어내 버리고, 온갖 장난감이 즐비하던 아이방의 물건들을 조금씩 정리했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갈텐데, 이제는 아이를 완전히 자기방으로 독립시키고, 나도 서서히 다시 남편과 합방을 하여(?) 진정한 어른의 라이프스타일로 회귀하고 싶었다. 아이와 같이 자는 가족침실이 아니라, 부부만의 침실에 예쁜 화장대와 내 드레스룸을 화보처럼 꾸며놓고 잡지처럼 좀 살아보고 싶었다.

© JillWellington, 출처 Pixabay


아이 키우는 삶은 아무리 미화시키려해도 한마디로 너무 구질구질했다. 이렇게 사는게 결혼이고 육아인 것인줄 알았더라면 나는 그냥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늙어죽었을 것이었다. 외로우면 뭐 어때? 나는 그냥 온갖 예쁘고 화려한 옷들을 맘껏 입고 멋진 구두를 신으며 온 세계의 도시를 정처없이 헤매이다가 외로워 늙어 죽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 번 생은 엄마가 되기로 결정했기에 무를 도리는 없다.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정해진 배경과 무대에서 어떻해든 이 연극의 스토리를 해피앤딩으로 끌고 가는 수 밖에는 없다. 엄청나게 구질구질하고 초라한 이 흑역사를 다 겪어내고, 나중에 아이가 한 인간으로서 정신이 좀 드는 나이가 되서야, 나에게는 이런 과거는 없었던 양 우아하게 웃고 앉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밀라논나' 할머니처럼.



사실 나는 이제 좀 살만하지 않은가?


분명히 한해 한해 지날수록 아이 기르는 일은 한결 수월해 졌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 뒤를 종일 졸졸 따라다니며, '안돼'를 연발하고 세상 눈치를 다 보던 하녀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양반이다 못해 여왕같은 삶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어우 나는 십억을 준데도 그 시절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물론 아무도 안 줄 것을 아니까 해 본 말이다. 십억 정도라면 생각해볼 용의가 있다. ㅎ)


사람답게 정신 좀 차릴만하니, 이제는 다시 아이 낳기 전 싱글시절처럼 편하고 우아하게 살고 싶다는 헛된 욕망을 언감생심 품게된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놓으면 보따리 달라고 하는 격으로, 한 숨을 돌리고나니 점점 더 높은 삶의 수준과 레벨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란 어찌나도 간사한 동물인지.


© jimmy_conover, 출처 Unsplash


그래서인지 요즘들어 부쩍 내가 공들여 쌓아올린 일상의 시스템을 아이가 조금만 무너뜨리기라도하면 전보다 더 불같이 화를 내게 된다.


오늘 아침 자동차에 붙여놓은 연락처 판을 사정없이 쥐뜯어 놓은 바람에, 나는 아이를 크게 나무랐다. 물론 다시 사서 갈면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순간 짜증이 훅하고 치밀어 올랐다. 몇번이나 하지말라고 주의를 줬건만, 아이는 기어코 그게 그리도 뜯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동차 앞유리에 붙여놓은 연락처 판이 꼭 한번 뜯어보고 싶었구나. 그랬던 거구나!

그래, 귀찮긴 하지만 다시 가서 사면 되지 뭐. 괜찮아.'

육아서따위에 적힌대로 하자면 이렇게 말했어야겠지만, 화 그릇이 작디작은 나란 엄마는 그만 폭발해 버렸다.


"그걸 대체 왜 뜯는 건데, 하지 말라고 말 했잖아!!"

아니, 대체 왜 그걸? 그눔의 망할 쓸데없는 호기심을 인정해주려다 나는 속이 까맣게 타버릴 것만 같았다. 저걸 다시 인터넷에 주문해야하는 과정도 짜증나고, 사야한다는 사실 조차 한참동안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 같은 생각에 신경이 곤두섰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저런 연락처 판 같은 것은 언젠가 차를 팔아버릴때까지 꼼짝도 않고 저기에 붙어 있었을 텐데.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만드는데 아주 선수로구나!


이렇게 아이가 건드리거나 부수지만 않았다면 평생 신경 한번 쓸 필요가 없었을 수많은 물품들이 떠올랐다. 수도없이 떨어뜨려서 깨먹은 내 콤팩트, 천이 튿어진 쉬폰 블라우스, 구두에 달려있던 장식 버클, 한 쪽만 잃어버린 귀걸이들, 내 약혼반지 마저...ㅠㅠ 내 삶은 망했다. 요 작은 녀석의 미다스의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은 가차없이 파괴되어갔던 것이다.


© mael_balland, 출처 Unsplash


언젠가 아들녀석에게 그동안 니가 망가뜨린 모든 것에 대한 청구서를 보내볼까? 아마 본인은 기억에도 없다며 딱 잡아뗄것이다. 내 평생에 이토록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나를 미치게 하는 존재는 없었다. 그럼에도 다 용서하고 다시 더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존재도 겪어보지 못했고말이다. 물론 나도 부모님으로부터 청구서를 받는 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을 것이기에, 조용히 부채는 외상으로 상계하기로 한다. 우리는 모두 부모에게 큰 빚을 지고, 아이에게 다시 그만큼을 기꺼이 빚으로 내주어야하는 법.


겨우 일곱 살 된 아이에게 내가 너무 초딩 고학년 정도의 행동거지를 요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침에는 순간 울컥하여 버럭 화를 내긴했지만, 저녁이면 또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쓰다듬고, 인생을 갈아 넣으면서 '내 새끼'라고 애지중지하고 있을테지. 아이를 낳고서야 나는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감당해내야할 대가의 회계는 정확하다는 인생의 냉엄한 제무제표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인생에는 결코 공짜가 없다.


다만, 수지타산이 한참 맞지않는 장사인줄 알면서도, 육아란 폐업이 불가능한 업이다. 자식을 키우면서 살아갈 이유와 삶의 재미, 그리고 감동을 이자로 받으니, 꼭 밑지기만하는 장사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어떤 더하기 빼기의 이성적 계산도 무시한 채, 오늘도 타들어가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명상의 세계로 빠져들어본다.


내가 명상을 하도록 만드는 유일한 존재도 결국은 아이. 오늘도 내 정신 세계를 한뼘 더 넓혀주기위해 사고를 쳐주신 고마운 아들님.

옴~ 옴~

© conscious_design,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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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일곱 살 시절에 쓴 에센티아의 육아 일기입니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을 위해 공감과 응원의 마음으로 이 글을 띄웁니다.


에센티아의 육아일기

https://blog.naver.com/yubinssk82/222236395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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