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총감독은 오직 나
그 무엇에도 휘둘리고 싶지 않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바깥 상황이나 남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무슨 똥고집인지는 몰라도 내 나름의 생각을 이거다 싶으면 밀고 나가고 싶다.
누군가의 압력에 의해서나 분위기에 떠밀려서 결정을 내리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결과가 나쁘지 않다고 해도 영 기분이 좋지 않고 나의 존엄이 훼손된 듯한 기분이 든다. 결과가 아니라, 일을 추진해나간 일련의 과정과 의미가 중요하고 그 안에서의 내 모습이 어떠했는가가 만족감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언제고 그렇지 않겠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수록 확실히 이것은 점점 더 의식의 수면 위로 극명하게 떠오른다. 몸이 늙어가도 자라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오직 자의식뿐이기에 그렇다.
마흔의 문턱을 넘어서니 뭐로 가든 서울 만 가면 된다는 식의 결과 중시적 사고는 도리어 정신을 황폐화시키고, 자존감에 상처를 낸다. 내 스스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납득이 가야 하고, 남에게 등 떠밀려서 가 아니라 스스로 차근히 생각해가며 한 걸음씩 과정을 밟아나가야 한다. 그럴 때에만 성취와 뿌듯함이 온전히 내 몫이 된다.
한때는 무데뽀처럼 들이닥치는 대로 일을 해내고, 우선은 어느 정도 레벨에까지 다다르고 난 후에나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 살았던 적도 있다. 그 덕분에 그나마 지금 한숨 돌리며 당장 먹고 살 걱정은 안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시절에는 스스로의 마음을 챙기거나 기분을 다독여 주는 일 따위는 뒷전으로 미루어 두기 일쑤였다. 내 자아는 지치고 상처받는지도 모르는 채, 평판을 위해, 성공을 위해, 어떻게든 남들에게 인정받고 이너서클에 끼기 위해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그런 삶에는 결국 한계가 있지 않은가!
지칠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숨이 턱에까지 차 나가떨어지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여지없이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런 의문이 빼꼼히 고개를 쳐들게 된다.
나는 대체 뭘 위해 그토록 나를 닦달하며 살아왔을까?
나란 존재는 대체 왜 사는 걸까?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렇게 근원적인 존재론적 고민에 빠지다 보면, 결국엔 쓸데없고 부질없는 것들에 진을 빼며 사느니보단 진정 나답고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하며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찾아낸 일들에 대해서는 대단한 성공이나 남들의 인정보다는, 나 자신이 이 일을 대할 때 어떤 마음이 되는지, 이 일로 어떻게 나를 펼쳐가고 세상에 영향을 끼칠 것인지가 최고의 관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 일들을 함에 있어 과정 자체를 최대한 즐기고자 한다. 행복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더 이상 결과 그 자체가 아닌 과정과 의미를 더 중시하는 삶의 레벨에 다다른 것일까?
그렇다면 이렇게 사는 것이 전보다 더 고차원적이고 나은 삶의 방식이라는 확신에 차 있는가?
글쎄, 보통은 강한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지만, 가끔씩은 또 혼란스러워지기도 하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다. 아무도 몰라주는 나만의 의미와 자아 존중으로 쌓아올려가는 공든 탑이 대체 다 무엇이란 말일까 싶기도 하고. 몸서리 쳐지도록 고독하고 센티멘털해지는 날엔 다소 휩쓸리고 휘둘리며 이리저리 참견 받아도 사람들과 한데 엉켜 살아가는 게 결국 인생 사는 재미인 듯싶기도 하고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의 늪을 헤매게 되는 몇몇 날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드는 생각은 역시
뭐가 되었건 간에 나는 무엇엔가 떠밀리는 듯한 느낌이 싫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해서 해나갈 때야 비로소 가장 만족스럽고 마음이 개운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살아내야만 내 스스로가 자랑스러울 테고, 한 점 미련이나 후회도 없이 두 눈을 스르르 감게 되는 평안한 밤을 맞을 수 있으리. 그러니 완벽하게 100%가 아닌 확신이라도 '이 길이 맞다'라고 나는 당당하게 선언하려 한다. 아니 맞는 것은 처치하여 두더라도, '이 길은 내길'이라고, 그렇게 말하겠다.
두 번 다시는 내 인생에서 나 외에 그 무엇에도 쉬이 휘둘리며 살지 않겠다! 내 인생의 총감독은 오직 나 하나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