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여름이 좋아

어차피 완벽한 건 없잖아

by 에센티아

본격적으로 여름의 문턱으로 넘어온 듯하다. 기상학적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추위를 아주 심하게 타는 내가 조금은 덥다고 실감을 해야 제대로 여름에 진입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야말로 나 자신은 계절과 온도 변화의 경계선을 규정짓는 바로미터이자 휴먼 지표라고 나 할까?


그렇게 친다면 개개인이 모두 자기만의 계절 변화에 대한 전환점을 다들 가질 것이다. 다만 그걸 미세하게 느끼며 사느냐 마느냐로 삶의 여유를 제대로 누리고 있느냐의 척도로 삼을 수도 있겠다.


계절 변화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정신없이 바쁘다거나 삶에 찌들어 있다면 그야말로 여유를 누리며 사는 자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삶이 진정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스스로에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photo-1473496169904-658ba7c44d8a.jpg?type=w1

© ethanrobertson, 출처 Unsplash


나로 말하자면 일찍이 몸소 그런 변화들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영향까지 확실하게 받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여유라는 측면에서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일지 모른다. 다만 그 여유라는 것도 어느 틈에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되고 보니, 슬그머니 눈곱만큼도 감사를 느끼지 못하게 되긴 하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중얼거리면서도 감정이 쓱 하고 들어오는 걸 애써 중단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이미 느껴버린 걸 뭐 어쩌란 말인가? 식상함. 실증. 당연시 여김.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하는 사악한 것들인지를 머리로는 또렷이 알겠다. 하지만 과연 사악한 것들의 사악한 행태에 어울리게도 그놈들은 기습적으로 마음에 파고든다. 썩은 사과처럼. 악독한 것들 아주 그냥 썩 물렀거라!


처음에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하여 더 바랄 것은 없었다. 결혼하기 전엔 나란 자가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동에 벅차 한몇 년은 거뜬히 알콩달콩 버티지 않던가? 하지만 서서히 익숙해진 여유의 틈을 비집고 독버섯처럼 욕망과 욕심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여유는 됐고, 나는 이제 something more를 원한다. 더 좋은 집, 더 멋진 차, 그런 것들에 어울릴 뽀대 나는 물건들...

photo-1572953745960-14685e3e9b49.jpg?type=w1

© nathan_hurst, 출처 Unsplash


그런 생각이 온몸에 전염병처럼 퍼지자, 이제 시간적 여유는 위협을 받기 시작한다. 원하는 것들을 가지려면 결국 다시 시간과 몸을 희생해서 돈이나 가치로 바꿔야 하거든. 애초에 그게 너무 힘에 부쳐 선택했던 여유인데, 다시 욕망의 불구덩이로 뛰어들려 하다니. 미친 소리 같지만, 여유로는 더 이상 만족이 되지를 않는데 이걸 어쩌겠는가!


그래서 소소한 행복들을 다시 포기하고 무시무시한 쳇바퀴의 세계로 환원하려 했다. 그랬더니 거기는 역시 또 아니었던 것. 한번 싫어 뛰쳐나온 곳이 다시 들어간다고 뭐 좋아질 리가 있겠나? 역시 아니었다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올 뿐.


그렇다면 결국 거기도 아니었고, 여기라고 딱 맞는 것 같지도 않고. 대체 이놈의 인생 어쩌란 말인가? 그 어느 곳에도 결코 완전한 만족이란 없다는 진리만 뼈저리게 느낀 채 무기력으로 종결짓는 게 삶이란 말인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는 결혼처럼? 삶이란 어느 길도 우리를 완벽하게 구원으로 이끌지 못하는구나!


그걸 알았다고 해서 딱히 남은 삶을 더 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게 주어진 수명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동안 순간순간에서 최대한으로 빈번하게 좋은 감정들을 뽑아내는 수밖에는 없다. 노숙자든 대통령이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취해야 할 전략은 그 한 가지 밖에는 없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무엇인가 더해야 할 것이고, 어떨 땐 차라리 더 비우거나 버려야 할 것이다. 그 어떤 선택에 대해서도 이미 삶의 일부가 된 순간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거기서 최선을 뽑아내는 수밖에는 없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photo-1586902197503-e71026292412.jpg?type=w1

© mateo_giraud, 출처 Unsplash


갑자기 날씨가 홱 더워졌지만, 차라리 나는 그래도 여름이 좋다. 습기 때문에 쾌적하지 못하고 햇빛은 뜨거워 한낮엔 바깥에서 버티기가 버겁다 해도 추운 것보다는 한참 낫고, 아침저녁 일교차 갭보다는 헷갈리지 않아 만족스럽다.


어차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완벽한 건 없지 않은가? 계절에조차 이런 건 마음에 들지만, 다른 건 너무 싫은 속성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을 수밖에. 얄밉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섭리를 두고 내가 뭘 어찌하겠는가? 내 삶도 똑같다. 어떤 건 너무 마음에 드는데, 또 어떤 건 미쳐버릴 만큼 내다 버리고 싶어 죽겠다. 얼굴도, 몸도, 성격도, 남편도, 자식도...

photo-1498747946579-bde604cb8f44.jpg?type=w1

© les_photos_de_raph, 출처 Unsplash


다 끌어안고 살자. 좋은 것들, 싫은 것들 그 모든 게 다 합쳐져서 하나다. 증류시킬 수도 분리해낼 수도 없다. 뭉뚱그려봐서 얼추 좋으면 그걸로 되었다. 좋은 것 맞지? 그러니까 살고 있는 거면서! ㅎ


나는 여름이 좋다. 모든 면모가 속속들이 다 좋다는 건 아니지만, 퉁쳐서 그냥 좋은 걸로 하겠다. 나 자신도 그렇다. 내 삶도 그렇고.


그러니 이렇게 좋은 계절을, 다시없을 내 삶을, 소중한 하루를,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퉁쳐서 감사드린다. 감사합니다.

photo-1584890280660-9322ee35baf1.jpg?type=w1

© wilhelmgunkel, 출처 Unsplash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확신과 확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