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센티아 Sep 09. 2021

이 정도면 괜찮다는 기준

마흔은 원래 이런 거야

한동안 기분이 심란했던 것 같다.



물론 그 원인의 9할은 우중충한 가을장마로 인한 날씨 탓이 가장 컸을 게다. 비 오는 날은 정말이지 사람의 기와 에너지를 쭉 빨아들이는 힘이 엄청나니까. 하지만 1할 정도는 어딘가 술술 풀리지 않는 듯 느껴지는 요즘의 신변잡기들의 탓도 분명 있다. 그래서 오늘은 그것들이 대체 무엇인지 낱낱이 풀어헤쳐 정리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 nate_dumlao, 출처 Unsplash


시작하기 전에 말해두자면, 나는 정리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청소 같은 물리적 정리는 물론이고, 내용 요약이나 사건의 본질 파악을 위한 추상적 정리에도 꽤 능하다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전자는 날이 갈수록 더 유능해지는데 반해 후자 쪽의 능력은 약간씩 녹이 슬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원래 나이가 들수록 직관이나 판단력은 더욱 고도로 가다듬어진다는 게 통설인데, 어찌 된 일일까?



너무 많이 알게 될수록 확신이 떨어져 가는 게 인간 삶의 본질이기에 그런 것 같다. 그냥 적당히 알았을 때가 자신감과 결정력이 최고의 상태였건만. 삶의 여러 양상과 경우를 두루두루 둘러보고 이해와 납득의 폭이 넓어지면 질수록 도리어 단정과 판단은 더 어려워지기만 하고 있다.



이건 이래서고 저건 저래서.


사연과 이유 없는 사건은 없을 테고 사람 역시 너무도 다차원적인 존재이기에 이제는 무언가에 대해 내가 가지는 관점을 스스로 의심하고 검열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그 과정 자체가 신중하고 현명하다고 자화자찬하며 뿌듯해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덧 나는 스스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내 심사숙고의 사유를 세상천지에 도통 알아줄 이도 없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우유부단하거나 나약하게 보여 이용당할 빌미를 주거나 무례한 대우를 받을까 봐 염려되기도 하였다.


© Christoph, 출처 Pixabay


결국 적당한 무지와 둔감함이 살아가는 데는 훨씬 도움이 되지 않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흑백논리로 세상을 바라봤던 어린 시절, 세상을 보는 렌즈는 비좁고 치우쳐져 있었을망정 한없이 삶을 누리고 도전해 볼 용기를 품을 수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흑백은커녕 세상엔 온통 회색 지대밖에 없는 듯하여 섣불리 아무것도 판단 내릴 수가 없다. 분명 실수는 적어졌지만 사는 재미는 거의 상실한 듯하다.



악역이 한 명도 없는 일본 드라마처럼, 출연자 저마다 실은 다 착하고 나약한 존재들이어서 우리나라 막장드라마에 비해 싱겁고 별다른 감흥도 없는 그런 인생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 해서 내 인생에 엄청난 반전이 숨겨진 막장을 원하는 것인가? 한시도 긴장을 멈출 수 없는 롤러코스터 같은 삶의 레일에 다시 한번 오르고 싶은 것인가? 불장난으로 집과 속을 홀라당 태우는 한바탕 방화극을 연출하고 싶냐고?



냉정히 판단하자면 그런 건 결코 아니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내 안의 9할은 물론 항시 평안과 안락함을 바라고 있다. 갑자기 휘몰아치는 그 무엇도 지금의 이 쾌적한 일상의 풍경화에 들이 고프지 않다. 다만 계속되고 반복되는 이 긴긴 채워지지 않는 1할은 어찌할 것인가?


© freephotocc, 출처 Pixabay


얼마 전 [프랑스 아이처럼]이라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육아서로 유명한 파멜라 드러커맨의 [맙소사 마흔]을 읽었다. 솔직한 필체로 자신의 마흔을 맞는 심경과 비범한(?) 체험들을 나눈 책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단숨에 일독했던 것 같다. [프랑스 아이처럼]을 출판하던 시기에 혈액 암으로 투병을 하고 있었다는 뒷이야기에 깜짝 놀라기도 했고, 남편의 마흔 생일 선물로 쓰리썸을 준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경험에서 내 또래 서구인의 성생활과 부부관계의 맥락을 엿볼 수 있었다.


북하이브발매2013.03.20.
세종서적발매2018.12.17.

문화를 뛰어넘어 마흔을 살아내는 이들의 심경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불안이다. 그토록 기대해왔던 어른으로서의 내 정점의 모습이 이제는 영영 이 땅에서 실현되지 못할 것만 같다는 불길한 예감. 그리고 그것이 점점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징조들. 우리는 분명 어른의 옷을 입고, 이제 누구라도 우리를 어른으로 대하지만 실상 그 거죽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스무 살 시절의 여전히 미숙하고 겁 많은 마음인 것이다.


어른인 척 살고 있는 수많은 미숙하고 철없는 마흔들. 그게 원래 이 지구를 거쳐간 모든 어른들의 삶의 모습이라면 그저 안심해도 될지 모른다. 원래 다 그런 거라면 나만 왜 이런 지 걱정하며 불안해할 필요 없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마흔의 취약함과 흔들림을 고백하는 이 책에 잠시간 안도하였다.


© nate_dumlao, 출처 Unsplash



지금 내가 느끼는 1할의 이 찝찝함은 그저 영원히 메꿀 수 없는 그 무엇인 건지 모른다. 이 세상에 그 정도 구멍도 뚫리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이는 없을지 모른다. 그걸 모르기에 혼자만 애달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두가 그렇다면 그게 정상인 것이므로 애쓸 필요 없다고 그렇게 생각해 본다. '정상' '비정상'을 구분 짓는 자체를 흑백논리라 여기려는 내 머릿속 회색 이성이여, 꺼져버려라! 내게 그것이 위안이 된다면 그냥 좀 나를 내버려 두란 말이다.



나는 철들고 지혜로운 어른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그건 한순간도 내 꿈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행복하고 경쾌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 바로 그것이 내가 평생을 꿈꿔오던 삶이었다. 이제 더 이상 체내에서 자연히 분비되는 호르몬들은 나를 도와주지는 않을 것 같다. 점점 메마르거나 감소할 뿐.



그래서 마흔에게는 이런저런 장치와 연출, 도구들이 무수히도 필요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새로울 것 없는 옛사람들이 이미 다 궁리하고 해 본 것들이지만, 이제 나도 그 의미를 진정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1할은 채워지지 않은 채로 그냥 살자, 나머지 9할이 있는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면서. 그나마 그것들도 언젠가 저 공기 중으로 다 흩어져 사라져 버리기 전에.


© mukulwadhwa, 출처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바라는 대로 믿어야 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