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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센티아 Jul 19. 2020

어쩌다 주부

살림이 참 싫습니다만


나는 살림을 참 어지간히도 싫어한다.


살면서 살림에 관심이 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살림 따위와는 연이 없는 것처럼 살고 싶었다. 죽을 까지 일하며 사회 활동에 전념하다 보면 저절로 그렇게 살게 될 거라 막연히 맹신하고 있었다. 사실 회사를 그만 두기 전까지 그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었다.




4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으니, 당장 집안일을 직접 해야만 했다. 생활비에서 조금 무리를 각오하면야 가사 도우미를 불러 가끔 청소나 밑반찬 같은 일을 맡길 수야 있겠지만, 그건 일시적인 해결책일 뿐. 매일 한집에 같이 살면서 치워주고 살림을 도맡아서 해주는 입주 도우미가 아닌 이상, 어차피 이제는 내가 떠맡아야 했다.


평생 관심도 없었고, 서투른 집안일을 하려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살림하는 것이 진저리 나게 싫어서 펑펑 운 적도 있다. 몇 날 며칠을 내팽개친 채 방치해보기도 했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필요 최소한의 것들만 하며 버텨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더는 방법이 없어, 그냥 살림을 잘 해내기로 작정하였다.

도저히 더는 방법이 없어서.


피할 수 없는 일은, 해낼 수밖에 없다!




살림이라는 낯선 세계 


어쩌다 살림을 이토록 못하고 싫어하는 내가 살림하는 여자가 된 것일까?



찬찬히 예전엔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회상해 보았다. 결혼 전에도 나 혼자 산 세월이 10년이 넘었건만, 그때는 대체 어떻게 살림을 건사하며 살았던 거지?


돌아보니, 혼자 살던 살림이란 세상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면 잠시 몸을 뉘일 베이스캠프 기지를 정리 정돈하는 수준이었을 뿐, 진정한 살림은 아니었다. 살림이 일상에서 일과표의 주요 과제로 편성되어 매일 업무처럼 수행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혼자 살던 나는 청소를 거의 하지 않고 살았다. 그렇다고 집이 지저분했던 것도 아니다. 언제나 깔끔하고 모든 것은 제자리에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애시당초 물건을 어지르지를 않는 성격이었다. 쓰던 물건은 항상 그 자리에, 옷도 정해진 곳에 고이 걸어두었다. 집에서 요리는 인스턴트 라면이나 카레를 끓여먹는 정도로 전적으로 외식에 의존하다 보니, 집이란 뱀이 허물을 벗듯 그대로 나갔다 그대로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10년 동안, 내 몸은 그냥 그렇게 임시적 살림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누가 살림을 대신해준 것도 아니었는데 손에 거의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 수 있었던 비결은, 그런 나만의 라이프스타일에 최적화된 스킬에서 비롯된 것이었나 보다.




어쩌다 주부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집'에서 살림이라는 것에 첫 발을 들이게 되었다. 맞벌이 신혼부부에게 어차피 집은 둘 다 잠만 자고 나가는 곳이었고, 주말 조차 항상 액티브한 아웃도어 라이프를 즐겼기에 살림은 임기응변식으로 대충 돌아갔다. 집을 꾸미는 인테리어는 신나고 재미있었지만, 빨래하고 청소해야 하는 노동은 전혀 흥미롭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그래도 공평하고 사이좋게 부부가 나눠서 하는 그 정도 살림은 큰 부담이 아니었다.


상황이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하게 된 것은 역시나 아이의 탄생이었다. 워킹맘이 된 나는 직장을 다녀야 했기에, 지방에서 올라오신 시어머님께서 같이 살며 아이를 돌봐주시고 살림을 대신 맡아 주기로 하셨다. 불편한 마음 반, 고마운 맘 반으로 살림 전권을 건네 드렸다. 평생을 살림꾼으로 살아오신 시어머님의 살림 실력은 물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것이었다. 다만, 1년을 채 못 버티시고 어머님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에 의해 시댁으로 돌아가셨다.


시어머님이 떠나신 후에, 나는 다시 살림이라는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것처럼, 한동안 혼란과 좌절에 빠졌다. 돌봄 이모님에게 아이를 종일 맡겨두고 진정한 워킹맘의 비애를 겪게 되었다. SNS에서 보고 들어왔던 구구절절 워킹맘의 사연들이 전부 다 내 얘기가 되었다. 


시어머님이 집안 곳곳에 한가득 채워 놓으신 살림 가재도구들을 나는 그냥 떠맡아 사용했다. 뭐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채, 그냥 닥치는 대로 살림을 꾸려 갔다. 그렇게 꾸역꾸역 하루하루 견디며 사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랬던 내가 드디어 살림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것은, 4년 전 퇴사를 결심하고 나서였다. 이제는 내가 전업주부로서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 매일 요리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진짜 살림!


처음 몇 주는 의욕에 차서 온 집안을 다 뒤집어 놓았다. 요리는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가며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메뉴에 도전하고, 종일 쓸고 닦아 매일 반질반질 윤이 나게 집안을 청소했다. 이케아에서 인테리어 소품을 쇼핑하고  


그 모든 것들이 재미있었느냐고?

지옥 같았다!

하면 할수록 피곤하고 귀찮고 재미는 없는데 힘만 들었다. 




살림이 뭐길래


빨래는 대체 왜 갤까? 아무리 시간을 들여 차곡차곡 개어 놓은들, 바로 펼쳐서 입을 건데.

종일 쓸고 닦은 집 바닥은 어차피 어린이집 하원한 아들의 흙 발에 단 5분 만에 초토화이다.

1시간 동안 만든 찌개는 길어야 10분 만에 다 먹어치우고 나면, 30분 동안 해야 할 남은 설거지가 한가득이다. 요리를 시작해서 만들고, 차리고, 먹고, 정리하는 동안 주부는 도저히 앉을 새가 없다.


이게 대체 뭐지?


인생에서 만난 모든 여자들이 최소한 요리는 재밌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랍쇼 이상하다. 대체 뭐가 재밌다는 거지?

나는 참 요리에 소질이 없었다. 레시피대로 하는데도 맛은 그저 그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고생과 시간을 들여 만들기에는 노력 대비 결과가 너무나 허무했다. 한끼의 단란한 식사를 위한 주부의 토나오는 엄청난 노동. 


살림 중에 그나마 내가 유일하게 싱글 시절부터 즐기며 공들여했던 것은 옷장 정리였다.

계절 바뀔 때마다 옷장을 다 뒤집어서 철에 맞는 옷들을 다 눈에 띄게 걸어두고, 이 옷 저 옷 코디해보며 한 옷을 한 계절에 두 번 이상 입지 않을 수 있게 정리해 두는 일. 일주일치 입을 옷을 다 코디해서 옷걸이에 걸어두기.


아 놔~ 근데 전업주부로서 일주일간의 의상 코디가 무슨 낙이 있단 말인가!

오히려 너무 옷을 차려 입고 돌아다니면 괜스레 동네 사람들에게 눈치만 보였다. 어디 다녀오시는 모양이라고 어찌 나들 아는 척을 하는지.


"전 그냥 집에서도 원래 이렇게 입고 다녀요!"

... 라고 쏘아 붙이고 싶었다. 

같이 살림하는 처지에 복장을 통한 전업주부로서의 동질감을 깨고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이 영 불편했던 것일까? 왜 그토록 남 옷 입는 일에 관심이 많아 쳐다보고 경계의 눈빛을 쏘아 대는지.


아무튼, 내 평생에 이토록 허무하고도 보람 없는 일은 없었는데.

재능도 없고, 흥미도 느껴지지 않는데, 열심히 노력한다 해서 딱히 보상마저 없다니.

그저 손 놓으면 안 한 티만 확실하게 날 뿐.


살림이 주는 수많은 감정 중에서 최악은 바로 이런 허무감이었다.

현상 유지를 위한 끝도없이 반복되는 투입




피할 수 없다면


살림에서 어엿한 삶의 의미나 목적의식을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변함없는 사실은 누군가는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그 주체는 바로 나였다. 당장에 다시 돈 벌러 밖에 일을 하러 나가지 않을거라면 이 모든 것은 내 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피할 수 없는 것은 해낼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나는 정말이지 굼벵이처럼 느리게 서서히 한 분야 한 분야 씩 마스터 해 갔다.

먼저는 요리, 다음은 빨래, 그다음은 청소...


매일매일 종합적으로 이 모든 것을 섭렵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일주일에 한 분야씩만 정해 와장창 해내고, 엉망인 것은 엉망인 채로 공존한 채 두는 방식으로.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어언 3년.

수많은 시간의 투입을 이길 그 어떤 진전의 테크닉이 세상천지에 있을 리가 있을까?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선조들의 오랜 지혜의 문구가 여실히 증명하듯 말이다.


지금의 내 살림 솜씨는?

주변의 프로 주부들에 비하면 여전히 어설프기 짝이 없다. 

하지만 예전의 나에 비하면 상당히 괄목한 발전을 거두었다고 자부한다!



다음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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