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센티아 Jul 20. 2020

살림하는 여자

살림하지 않는 삶을 꿈꾸는 여자 

전업주부로 산지 어언 3년.

수많은 시간의 투입을 이길 그 어떤 진전의 테크닉이 세상천지에 있을 리가 있을까?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선조들의 오랜 지혜의 문구가 여실히 증명하듯 말이다.


지금의 내 살림 솜씨는, 주변의 프로 주부들에 비하면 여전히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예전의 나에 비하면 상당히 괄목한 발전을 거두었다!




이전에는 뭐가 뭔지 몰랐기에 살림도구라면 그냥 쓸 수만 있으면 그만이지, 하나도 욕심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식기를 비롯해 각종 살림 용품에 대해서도 내 나름의 취향이라는 것이 생겼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내 살림살이로 집안 곳곳을 다 채워 넣고, 나만의 방식으로 살림해 나가고 싶다는 주체의식도 확실하다.


그래서 어느 날 하루 날을 잡아, 싱크대와 다용도실에 가득 차 있던 시어머니가 가져오신 식기들과, 친정어머니가 채워놓은 살림살이들은 깨끗하게 비워버렸다. 고맙긴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내 살림을 내 방식대로 해나가려면 내게 딱 맞는 물품들이 필요했다.



냉장고도 싹 다 비우고 정리했다. 항상 양가에서 보내주신 얼린 반찬과 식재료들이 썩어갈 정도로 한가득 있었다. 그렇게 먼저 비우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식재료들로 다시 채워 넣었다. 어른들께는 더이상 반찬을 보내주지 마십사 정중히 부탁드렸다. 그래도 계속 보내시긴 한다.


집안 청소는 스톱워치로 15분 정도 알람을 맞춰두고 한번에 몰아서 폭풍처럼 해낸다. 정리에 대한 강박이 있었던지라 전에는 아이나 남편이 물건을 흩트러뜨리거나 집안을 어지르면 심하게 짜증이 났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틈엔가 그것도 슬쩍 내려놓았다. 


집안이 지저분해지면 일단 내 동선과 생활권 위주로만 재빠르게 청소를 하고, 나머지는 문을 닫던가 하여 내 시야에서 차단한 후 일단 정신 탈출을 한다. 그리고는 다른 정신적 활동에 기력과 지력을 쓰는 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침부터 밤까지 청소만 하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빨래는 여전히 취약 분야이다. 세탁은 무조건 세탁기에 돌리는 주의라 옷감이 남아나질 않지만, 그냥 저렴한 옷을 사 입는 것으로 타협했다. 비싼 옷은 옷 자체만 비싼 게 아니라, 실은 드라이를 맡기고 관리를 해야 유지가 되기에 계속해서 돈이 드는 법이다.


저렴한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으로 막 입고 막 빨아서 막 널고, 수명은 길지 않겠지만, 못 입을 수준이 되는 때가 오면 다시 한 장 구입하면 된다. 원단이 좋은 브랜드 옷은 어차피 그 10배는 줬어야 될 옷들이고 매번 드라이를 해야 한니 말이다. 차라리 이게 더 유행과 트렌드에도 맞고 경제적이다. 


환경보호론자들은 이런 나를 맹비난할 것인가? 우리 중 자연을 일도 오염시킨 적 없는 자부터 먼저 내게 돌을 던지라 그래!




무엇보다 가장 큰 발전은 역시 내가 화분을 키울 수 있을 정도의 살림꾼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엔 선인장조차 말라 죽였던 최강 살림 낙제생인 나였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꽤 무성한 풀잎과 꽃을 피우는 화분을 열 개나 키우고 있다.


집에 워낙 햇빛이 잘 들어 물만 제때 주면 되는 임무이지만, 나로서는 이것이 얼마나 큰 장족의 발전인지를 뼈 절이게 실감한다. 현재 우리 집 인테리어는 한마디로 플랜테리아를 테마로 실현시킨 수준이다. 


과거의 내가 지금 우리 집에 놀러 온다면 

필시 나를 '살림 마스터'로 인정할 것.ㅎ




평생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서서히 배우고 유능해지며, 마스터해가는 기쁨이란 여간 큰 것이 아니다. 그건 마치 새로운 외국어를 하나씩 배울 때마다 자신만의 정신세계와 삶의 지평을 확장해 가는 것과도 같은 경이로운 경험이다. 뇌 속에 쓰지 않던 새로운 영역을 반짝이게 하는 신선한 자극이자 훈련이라고나 할까


내게는 살림이 그랬다. 서른 후반에 와서야 경험하는 진정한 신세계이다.


물론 내가 아무리 해봤자, 마샤 스튜어드 같은 현모양처 살림 만능 주부 9단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스스로도 결코 그걸 목표로 두거나 염원하지는 않는다. 다만, 영원히 모르고 살았더라면 참 아쉽고도 아까웠을 삶의 한 영역에 발을 들이고,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진정한 재미와 참맛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뿌듯하다.


여전히 나는 살림과 관련된 수많은 노동이 귀찮고, 이보다 훨씬 흥미로운 일이 세상에는 지천으로 널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제적 여유만 충분하다면 가능한 모든 살림을 외주를 주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내가 그 분야에 대해 잘 파악한 상태에서 남에게 맡기는 것과 아닌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한때 살림의 일도 모른 채, 시어머님과 도우미에게 살림을 온전히 의지했던 시절을 회상해보면 그 차이는 더욱 극명해진다.


이제 살림은 하루하루 대면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일과로 어느새 그렇게 내 일상을 차지하고 있다.

살림의 다채로운 범위와 그 속의 기술들을 파악하고 있는 나는, 내 페이스대로 완급을 조절하며 삶의 리듬을 타며 살림을 한다.





내 꿈은 여전히 언젠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살림 노동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온다 해도 여태껏 내가 살림을 통해 함양한 취향과 안정감과 포근함이 넘치는 가정을 가꾸어 가고자 하는 노력에는 끝이 없으리.


... 살림하는 전업주부 김 모 씨



매거진의 이전글 어쩌다 주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