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센티아 Jul 17. 2020

외모와 치장의 의미 변화_2편

나이에 맞게 아름다워진다는 것

나이가 들면 대다수는 외모의 중요성이 예전같지 않아진다. 상대적으로 다른 요소들이 자신을 정의하거나 평가하는데 있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직업 특성 상 외모가 곧 상품이 되는 특수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기혼자가 부모라는 역할까지 입게됐을 때 뛰어난 외모란 미비하고 부차적인 힘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애엄마는 애엄마고, 애아빠는 애아빠이며, 할머니는 할머니일 뿐이다.   

예쁜 애엄마와 잘생긴 애아빠, 미인 할머니라하여 사는데 별다른 큰 혜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이들은 아주 늦은 나이까지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거나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것


외관이 본인의 가치관이나 존재의 의미와 너무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경우, 속이 허하고 채워지지 않는 경우, 심각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경우에는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외모에 대한 병적 집착이 심해지기도 한다.


한국에는 특히나 이런 타입이 많다. 사상 유래없는 성형 대국, 이목구미가 서양인 처럼 되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 있어보여야 하고, 기회만 되면 갑질 좀 하고 싶은 이 곳에는, 어떻게 해서든 타고난 운명과 나이를 거스르는 외모를 소유하려고, 수면 아래 백조의 발처럼 눈물겨운 몸부림을 쉽게 볼 수있다.


나는 이런 세태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그냥 현 시대의 실상이고, 풍조이며, 그 속에 우리가 살고 있을 뿐임을 자각할 뿐이다. 또한, 이것은 급속한 물질중시 세태로부터 다음 차원으로 이행하는 과정중에 보이는 과도기적 문화지체현상임을 믿을 뿐이다. 유구한 역사의 흐름속에 이 또한 지나가겠지.


다만, 나는 세상의 흐름에 파도를 타기 전에, 나의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볼 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나 자신만의 태도와 가치에 대해 말이다.




원없이 다 해봐야 여한이 없다


나는 젊은 시절 해보고 싶은 패션이며 스타일을 참 원없이도 다양하게 시도해봤다.

나름 참 용기가 있었던 것 같다. 겁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내 체형에 또는 피부색에 어울리던 아니던 그런 것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실험정신을 가지고 내가 입고 싶은 스타일대로 다양하고 과감하게 이것 저것 입어보았다. 그 시절 패션은 나의 열정과 자유를 발산하는 통로였고, 오늘은 뭘 입을까를 고민하던 시간들이 내게는 큰 환희였다. 옷을 보러다니고, 입어보고, 사서 모으고.


머리도 마찬가지이다. 금발, 빨간머리, 애쉬컬러... 안해본 색깔이 없는 듯하다. 긴생머리, 파마머리, 숏커트. 다양한 헤어스타일에 도전해보았다. 단 한가지 못해본 것이 있다면, 도저히 두상에 자신이 없어 빡빡머리만 못해봤다. ㅠ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코도 뚫고, 배꼽도 뚫어보았다. 뚫을 당시에 엄청 아팠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다 막혔다. 좋게 말하면 개성이 뚜렷했지만, 대중적인 시각에서는 좀 지나쳤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멋지면 그만이었다.


요즘은 옷 보러 다니는 시간 조차 아까워 여간해서는 쇼핑을 자주 하지 않는다. 어쩌다 옷을 고를때도 내 몸매를 돋보이게 해주거나, 세련돼보이되 편안한 느낌이 드는 옷들을 선호한다. 머리색도 타고난 컬러를 유지하고있다. 언젠가 흰머리가 심해지면 염색을 해야겠지만, 최대한 내 본래의 컬러로 할 생각이다.


그토록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해본 덕분에, 이제는 내게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고 있다. 유행이나 타인들의 기준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여한이 전혀 없다!




어떤 것은 참아서 참 다행이다


20대 후반 싱가폴에서 1년간 살며 몸에 타투(Tatoo)를 하고싶다는 생각에 한동안 꽂혀있었다. 1년 내내 여름이라 짧은 옷만 입는 그곳에서는 타투가 곧 패션의 일부였다. 지금으로부터 10년도 훨씬 전이니, 한국 감각으로는 약간 이른 감이 있었다. 당시 한국에선 연예인들이나 일부 특수업종 종사자분들(?)에게만 타투가 통할 시기 였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때 타투를 안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머리카락이야 뭘해도 다시 기르면 원상복구가 되지만, 타투를 했더라면 그뒤에 한국에서 회사원으로 살기에 참 깝깝했을 것이다. 이제와서는 한국에서도 타투는 꽤 일반적이 됐지만, 지금 마흔을 목전에 둔 나는 더이상 눈꼽만큼도 타투가 탐나지 않는다. 정 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면 여름 한때 잠깐 헤나를 하면 될 것을.


타투를 멋지게 소화하는 이효리같은 사람도 있지만,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때 쪼글쪼글하고 쳐진 피부에 새겨진타투는 진짜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철없던 시절에 혹여라도 낯뜨거운 문구나 문양을 골랐다면 평생 부끄러움이 몫이 됐을지도. 


인정하기 싫다해도 다 나이에 어울리는 것이 따로 있는 법이다. 지금 나는 그렇게 믿는다.




외모가 바꿀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여지껏 살면서 얼굴에 칼을 댄적은 없다. 굳이 성형을 반대하는 자연주의자라거나, 미에대한 확고한 자기 주관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돈이나 시간의 여유가 없었고, 딱히 고쳐서 훨씬 더 미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화장으로 커버하는게 더 효율적이고 가성비가 좋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이런 내 모습 그대로도 항상 누군가는 예쁘다고 칭찬해주는 사람이 있었고 사랑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대중적인 지지는 아니었지만 나만의 매니아층이 있었던 것이다.ㅎ 그렇게 내 팬들(?)과만 연애하는데도내 젊은 날의 시간이 휙 지나가버렸기에 성형의 유혹에서 살아남았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딘가 성형을 했다한들, 지나온 내 삶보다 더 큰 행운과 기회가 훨씬 많은 시간들이 펼쳐졌을까? 과연 외모의 업그레이드가 내 삶을 더 높은 레벨로 이끌고 변화시킬 수 있었을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외모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나이에 맞게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


나이에 맞게 아름다워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간에서 말하는 관리를 받고 안 받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아름다움이란 외모와 옷차림은 물론, 스타일과 분위기, 제스쳐와 목소리, 그리고 채취와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어울려 만들어 내는 문제이니까.


그래서 겉에 무엇을 걸치고 무얼 바르느냐로 아름다움이 간단히 결정지어지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내 머릿 속에 그리고 마음 속에, 입속에 아름다운 것들을 채우고 또 채워넣어야, 겨우 그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으로 넘쳐 흘러내리며 발산 되는 것이다.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사람들에게 가지는 마음이 겉으로 보여지는 취향과 스타일에 어울어져 나만의 아름다움이 만들어진다. 누군가에게 아름답게 보이는지 아닌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은 내 염원과 결심이 빚어내는 내 모습이 기분좋은 향기를 풍기며 세상에 영감을 주는지가 중요하다.


내 꿈은 나이에 맞게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내 의지와 집착은 어쩌면 끝이 없다. 


삶이여, 영원히 아름다움을 추구할지어다!



#아름다움 #삶의자세 #외모 #패션 #치장 #해방






매거진의 이전글 외모와 치장의 의미 변화_1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