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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센티아 Oct 16. 2020

부러우면 나도 해! 질투는 나의 힘

친구가 잘 되면 배가 아프다?

질투란 참으로 원초적인 감정이다. 예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기, 질투에 관한 무수한 야사와 민담이 넘쳐나고, 이를 금기시하려는 각종 시도들이 있어왔다. 질투라는 감정에는 다종 다양한 종류가 있어, 남녀 간의 애정과 치정에 관한 질투가 있는가 하면, 성별을 초월해 실력이나 재능에 대한 경쟁심에서 비롯된 질투, 동성 간에 미모와 인기에 대한 시기 질투 등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질투란 감정이 근본적으로 남과의 비교에 바탕을 두고 생겨나는 것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성 간보다는 동성 간에 유발되는 경우가 일상에서 더 흔하다는 점이다. 비교라는 것은 애초에 상이점이 너무 많은 상대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다고 여겨졌던 대상과의 사이에서 격차가 발생했을 때 더 도드라지게 다가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자가 더 힘이 세다거나, 새들이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헤엄을 잘 친다고 해서 시기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와 함께 자랐지만 훨씬 뛰어난 형제자매나, 피차 비슷한 처지라고 여겼던 친구나 이웃이, 벼락부자가 되거나 큰 성공을 거두었을 때 질투로 들끓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동경하는 연인이 내가 아닌 저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인지, 나는 남들에게 쟤보다 더 인기가 없는 것인지를 시기하며 슬픔에 빠진다.




어느 날 아침에 나는 우연히 SNS를 훑어보다가 옛 친구의 근황을 접하게 되었다. 한참 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던 친구의 프로필에 그녀가 출판했다는 저서의 표지 사진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000 작가...?

순간, '작가'라는 단어와 책의 타이틀이 내 머리 뒤통수에 쿵하고 도끼가 박힌 것처럼 내리꽂아졌다.

친구가 책을 냈다!

나보다 먼저 작가가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는 이미 두 권의 책을 출판 한 뒤, 자기 계발 강사가 되어 활발하게 대중 강연과 코칭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10년이나 전업주부로 살던 그녀가 멋지게 재기에 성공을 하다니. 아니, 그보다 내가 언젠가 이루고 싶다고 염원했던 일을 이미 나보다 훨씬 먼저 해내다니. 바로 내가 너무도 되고 싶은 그런 모습으로, 누구도 아닌 다름 아닌 그녀가!


나에게는 오랜 고등학교 시절 베프였던 그녀의 성공을 축하해 주는 마음보다, 솔직히 충격과 시샘이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는 복잡한 심경이 순간 차올랐다. 내가 그토록 선망하던 책을 출판하고 강연을 하는, 그 '작가' 이자 '강사'라는 직업을, 전혀 예상도 못했던 인물이 먼저 당당한 모습으로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인정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응당 그러하리라고 우러러보던 대상이 아니라, 엇비슷하거나 은근히 무시하던 누군가가 대박을 터뜨렸을 때야 말로 질투가 나서 견딜 수 없는 것이 삶의 추악한 진실인 법이다. 


© freestocks, 출처 Unsplash


내가 알던 그녀는 글을 쓰는 일과는 한참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또한 대중 앞에서 강연을 하는 모습도 나는 그릴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녀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지적 사색과는 거리가 먼 피상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교시절에 알던 모습이 누군가의 전부일 리는 없다. 우리 모두는 매 순간 끊임없이 다양한 경험과 선택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이므로, 한때 몇 년간 알았던 모습을 누군가의 본질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나 또한 모든 이에게 내 진가를 전부 보여줄 수 없으며, 한 시절의 단편적인 모습으로 됨됨이나 자질을 평가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기니 말이다. 


다만, 고교시절 이래 그녀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제멋대로의 이미지는 이랬다. 그녀는 영리하고 매력적이었지만,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자아에 결코 가깝지 못한 스스로와의 간극을 메꾸기 위해 항상 외모에 집착했고, 연애와 치장으로 우월감을 느끼며 자존감을 지켜나가는 타입이었다. 나와 그녀는 고교 때부터 베프로 붙어 다니며 학창 시절에 누릴 수 있을만한 온갖 유흥(?)을 함께 즐겼다. 유유상종이라고 서로 공통점이 많았으며 그 친구를 무척 좋아했었으니 그토록 붙어 다녔을게다. 하지만 호감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그 친구가 남다른 직관이나 통찰력이 있거나 노력파라고 인정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내가 그런 면에서는 그녀보다 더 깊이가 있다고 제멋대로 착각도 했던 것이 솔직한 심경이다. 


대학 졸업 후 내가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연락이 끊기고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녀는 20대 초반에 이른 결혼과 출산을 했기에 이후로도 우리의 인생 여정은 한동안 겹칠 일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만에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은 거의 10년 만이었다. 당시 나는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둘 낳은 전업주부의 삶을 살고 있었다. 첫 아이는 곧 초등학교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녀의 집에 초대를 받아갔지만, 당시 아직 미혼이었던 내게는 가정을 꾸린 능숙한 엄마가 되어있는 그녀의 사는 모습이 너무도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남편이 제공하는 안락한 경제적 울타리 안에 살면서도, 이른 결혼과 육아로 못다 펼친 자신의 꿈과 열정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듯한 속내를 꺼냈다. 하지만, 당시 나의 정체성은 한창 치열하게 커리어를 쌓으며 연애와 소셜 라이프에 심취해 있는 싱글이었다. 애라던가, 살림이라던가, 위기의 주부들 같은 이야기들은 당시의 내게는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공감이 가지 않았다. 돈벌이의 의무에서 벗어나 오로지 소비와 마음 챙김에만 열중하면 되는 속 편한 아줌마의 넋두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게다가 아직 어렸던 아이들이 옆에서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너무도 오랜만에 재회한 고등학교 친구와의 아득히 먼 마음의 거리를 좁히기엔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조차 힘겨웠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각자의 길을 갔다.


© struvictoryart, 출처 Unsplash


몇 년이 지나 드디어 나도 결혼의 세계에 입문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이번엔 내 쪽에서 먼저 그녀에게 연락을 해보았지만, 그녀는 남편 직장 때문에 멀리 지방도시로 이사를 간다 했다. 그게 그녀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그리고 천지가 개벽할 수준의 변화를 거치며 속절없이 수년이 흘렀고, 어느덧 나는 당시의 그녀처럼 전업주부가 되어있었다. 이제 곧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고, 매일 정신없이 나부대는 사내아이를 키우며 나는 도무지 정신없는 살림과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친구가 책을 내고 작가가 되었다는 것을. 강사로 활동하며 여기저기 강연을 홍보하는 포스팅을 SNS에 올려놓았다. 세련된 정장을 차려입고 당당한 모습으로 찍은 커리어 우먼의 사진을 보니, 뭔가 입장이 뒤바뀐 것 같은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며 혼란스러운 심경에 사로 잡혔다. 거울에 비친 내 차림은 레깅스에 후드티를 걸친 홈패션 그 자체였다.


10년간 아이들을 다 키워낸 그녀는 이제 다시 사회로 나왔는데, 나는 이제 한창 애를 키워내고 있다. 우리 애가 혼자서 제 앞가림을 다 하고, 내가 다시 사회로 돌아가 커리어에 매진할 수 있으려면 대체 몇 년 정도가 걸릴까? 그녀는 결혼을 일찍 했으니, 아직 30대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게다. 하지만, 결혼도 늦었던 나는 아이가 크려면 이미 40대를 훌쩍 넘긴 터인데. 나도 과연 재기할 수 있을까? 뭔지 모르겠지만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아이 낳고도 이것저것 해내고 이룬 사람들이 많던데, 나는 대체 뭘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고, 적응이 안된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무기력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이런 감정에 사로잡혀있는 것은 내게 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머리로는 알겠는데, 기분이 계속 내 발목을 잡아끌며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만 같았다. 나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대상도 없는데 마구 소리치고 싶었다.


다 돌려 노아~!

대체 누구에게 뭘 어떻게 돌려놓으란 말인가?!

결혼하기 전, 임신하기 전 상태로? 시간을 돌려 30대 초반으로?


바보 같은 억지를 쓰는 스스로에게 헛웃음을 지으며 친구가 출판했다는 책의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서 당장 e북을 주문해서 강철같이 비판적인 매의 눈으로 책을 읽어보았다. 어떻게 해서든 흠을 잡아보려는 마음이 계속해서 튀어 올랐기에 도리어 초집중해서 몇 시간 만에 정독을 할 수 있었다. 혹시 내 이야기는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기도 했다. 내 이야기인듯한 대목이 있었지만, 워낙 비중이 적어서 크게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아니었다. 연락도 안 하고 산지가 몇 년인데, 대체 뭘 기대한 것인지. 의문의 한 패처럼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참 우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서운해했다. 나도 참 웃기는 사람이다.


결국 인정해야 했다. 제목도 참 잘 지었고 소재도 매력적인 데다가 표지의 사진도 정말 예쁘게 나왔다. 시샘 많은 나 자신이여, 참으로 못난 자로구나! 축하는 못해줄 망정 흠잡을 것은 뭐 없는지 기웃거리는 심성이라니.




질투란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에 가까운 감정이다. 의지나 결심으로 억누르거나 다른 감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뿐이지, 마음속에 피어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질투를 느낀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다. 남에게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그런 감정이 든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비참하고 부끄러워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면, 상대의 평판을 깎아내리거나 해악을 가하는 등, 구체적인 행동으로까지 돌입하게 된다. 하지만 질투가 워낙에 원초적인 수치심을 일으키는 감정이라 그런지, 이성은 오만가지 다른 이유를 들어 질투가 아닌 양 가장을 하거나 자기 사고를 합리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질투라는 감정에는 세상 무엇보다 큰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다. 그 속에 있는 파괴적인 힘도 강하지만, 잘만 사용하면 엄청난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주기도 한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질투에 휘둘리거나 눈이 멀지 않고, 그것을 자신이 분발하는 동기와 열정의 땔감으로 삼을 줄 안다. 질투의 에너지를 상대의 파멸을 위한 불씨에 붙이지 않고, 자신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열정으로 활활 불태울 줄 아는 것이다. 


나는 여지껏 나 스스로를 그런 사람이라고 규정지으며 살아왔다. 

'나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따위의 마음을 먹느니, '부러우면 더욱더 부러워하며,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노력하는 거다!'.

사람은 결국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로 정체성과 인생이 판가름 나는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질투를 느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쓸지는 내 선택과 결심에 따른 것이다. 나는 그것을 파멸과 절망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자양분으로 쓰겠다!


한국인들의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질투와 경쟁의 과다라고 꼽는 이들이 많다. 이런 일반론에 무슨 객관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살면서 경험적으로 내가 느낀 바로도 공감하는 바이다. 다문화를 경험해본 이들이라면 한국인이 유독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칭찬에 인색하고, 경쟁적인 경향이 강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빈말이라도 칭찬을 건네는 언어 습관이 한국사회에는 한참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살수록 각박하고 열등감이 느껴지게 만드는 세상이지만, 역으로 그것이 큰 에너지로 작용하여 오늘날 세계에서 손꼽을만한 경쟁력을 다방면에서 갖춘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는 법이다. 개인의 삶의 레벨에서는 결국 그 모든 모순들 속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자기 삶에 건강하고 도움이 되는 쪽을 취해 내 인생을 해석하는 긍정적인 렌즈를 만들어내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질투라는 감정을 나 자신을 갉아먹는 비참하고 파괴적인 축축한 시궁창에 처박아 썩도록 두지 않고, 나를 위해 양지 밝은 곳에 널어서 뽀송하게 말리기로 한다. 남의 성과와 성공 앞에 위축되거나 날 선 비판으로 눈에 불을 켜지 않고, 그들을 인정하고 축하해주는 한편, 나 자신도 더 분발하고 성장할 수 있는 동인으로 삼아가려 한다. 그런 이들을 시기, 질투하느라 진을 빼고 있느니, 그런 이들을 배우고 닮아가며 그들과 친구로 지내는 것이야말로 진정 바라는 속내가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바로 내가 이번 생을 살며 꼭 되고 싶은 모습이니까.


그래, 친구도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어!


10년 동안이나 전업주부를 하다가도 이렇게 용기를 내어 도전했는데, 하물며 그 시간 동안 공부하고 스펙과 경력을 쌓은 나라고 못할 것은 없지. 허세를 부리거나 배짱을 부리려는 것이 아니라, 나도 더불어 분발하고 희망을 가지는 쪽으로 갈피를 잡았다. 다른 이들이 그렇게 하도록 돕기 위해 친구도 책을 쓴 것이 아니겠는가!

그 친구에게 조용히 마음으로 축복과 응원을 보내며, 나도 내 삶 자체에 더 충실해 지기로 한다. 결국 남들로부터 자극을 받았는다고 해서 그들과 같은 방향과 속도로 내 인생을 억지로 이끌고 갈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내가 원하는 대로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이 땅 위에 질투가 없었다면 그 어떤 문명도 성장하고 발전할 수 없었으리라. 나를 키워나가는 원동력으로 나는 질투와 부러움을 마음껏 쓰련다. 시기와 질투를 느끼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고 축하하리라. 모두들 더욱더 잘되고 번창하기를. 그리고 언젠가 나도 함께 너무도 만족스럽고 생기 있는 하루하루를 사는 나도 그들과 함께 축배를 들리라. 


'부러우면 나도 하면 되는 거다.'


언젠가는 나도 꼭 작가가 될 것이다.

이것은 그 누구에 의한 것도 아닌, 나의 오랜 꿈이니까! 

내가 시기와 부러움을 느끼는 모든 이들처럼 나도 인생을 멋지게 살기로 한다.


© hannaholinger,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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