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저녁 시간, 시간이 되었으니 식사를 한다는 느낌으로 밥상 앞에 앉았다. 밥을 먹으며 느껴지는 적적하고 조용한 집 안 공기가 싫기에 목적 없이 TV 프로그램을 틀었다. 의미 없는 리모컨 버튼만 움직이고 있을 때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라는 프로그램이 방영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에서는 아주대 김경일 교수가 라이언 홀리데이의 '나는 미디어 조작자다'라는 책을 소개하며 현시대에 만연하게 퍼져있는 조작된 미디어에 대해 강연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리모컨을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고, 식사를 하는 것보다 프로그램 내용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직접 책을 사고, 시간을 내어 정독한 것이 아니기에 강연 자체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강연을 들음으로써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수면에서는 헤엄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욱이 강연을 들으며 나와 의견이나 평소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이 내용을 글로 작성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프로그램에서 김경일 교수가 강연하는 내용의 주된 흐름은 이것이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이는 모든 미디어는 대체로 조작된 미디어다. 조작된 미디어란, 완벽히 거짓으로 꾸며진 픽션은 아니지만 그 실상은 거대한 거짓 냄비에 진실 한 스푼을 떨어뜨려 우리에게 미디어 수프를 내어주는 꼴이다. 또한 더욱이 문제로써 나아가게 되는 점은 이 수프를 먹는 우리 독자, 소비자들이 수프를 의심 없이 먹어주는 것이라는 거다. 이 수프가 어떤 방식으로 조리되었는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조리되었는지 우리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저 자극적인 수프의 맛을 즐기고 있다. 이것이 현시대의 미디어 조작자들이 활개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다."
위 내용은 주된 흐름을 나의 말에 맡기어 표현해낸 것으로, 프로그램 안에서 저와 같은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문맥적인 부분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다시 돌아와 나는 이 내용을 들으며, 깊은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미디어에 노출되며 살아가는지 생각해보자. 일단 나의 경우에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침 뉴스로 하루를 시작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 기사를 본다. 생활을 하면서도 수많은 광고에 휩싸이고,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블로그 등을 통해 많은 영상 매체나 글 매체를 접하게 된다. 거의 기상부터 취침까지 미디어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과도 같은 형상을 보여준다. 이런 나의 행동 양식이 보편적인 현대인의 행동 양식이라고 보기엔 무척이나 어렵겠지만, 많은 이들이 생활을 하며 미디어를 접하고 싶지 않아도 셀 수 없을 만큼 접하게 되리란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고 넘어가 보자. 우리는 이렇게 많은 미디어를 접하면서 이 모든 것들을 의심하거나 혹은 진실이 아닐 것이라고 믿어왔는가.
이 이야기는 새롭고 한 순간에 툭하고 튀어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부터 미디어는 어느 정도 조작된 정보를 내보내고 있을 가능성이 크고, 우리는 그것을 분별하고 의심해야 하는 바람직한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그러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이러한 미디어가 우리 주위에 공존하고 있을까. 나는 그에 대한 책임은 미디어를 작성하는 크리에이터, 기자 등등의 많은 창작자에게 큰 파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에 관한 큰 파이는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비판적이어야 한다. 물론 비난을 잘못된 것이지만, 비판은 미디어에 있어 가장 건강한 영양제라고 생각된다. 비판하지 않고 모든 것에 있어 수용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면, 결국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를 세상에서 자신이 현재 처하여 있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된 이성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빼앗기는 상황에 내몰릴 것이다.
이러한 예측이 너무하다고 생각되는가. 나는 그런 이들에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동물농장'은 물론 공산주의를 재치 있게 설명해 나아가는 소설이지만 그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무지하고 판단하는 것을 포기한 시민들의 최후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 권력을 쥐고 흔드는 돼지 나폴레옹이 충직한 프로레타리아를 형상화한 말 복서를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라. 복서는 결국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나폴레옹의 감미로운 혀에 속아 자신의 모든 힘을 바친 후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지 않는가. 물론 이 소설이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이기에 지금 글의 내용을 완벽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소설을 보며 다른 사건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미디어를 제작하는 이들을 나폴레옹이라 칭하고 이를 접하는 소비자를 복서에 비유하면 꽤 잘 들어맞지 않는가. 만약 복서가 의심 없이 그를 찬양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일말의 의심을 가지고 판단하고 의심하고 살아갔다면 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우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들에 대해 바람직한 의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들이 왜 이것을 나에게 주는지 목적을 생각해보고, 이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방식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지만 우리의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어 행동의 제약을 거는 것들에 대해 대비하고 대처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며 그저 우리는 사회가 내려놓은 끈에 자발적으로 묶인 마리오네트가 되어버릴 것이다.
또한 한 가지 더 권유할 것은 미디어를 너무 빠른 속도로 넘기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이다. 이는 또 무슨 소리인가 하면, 프로그램에서 김경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미디어를 소비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그 찰나의 1초로 사람들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더 자극적인 단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라고. 너무 빠르게 미디어를 넘긴다면, 우리는 그것이 거짓된 것인지 진실된 것인지 판단할 시간조차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못한다. 스스로에게 제약을 거는 셈이다. 그렇다면 조금은 글을 읽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며 스스로 정리할 시간을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이자 권리다. 눈 뜬 맹인 되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 그렇기에 피곤하더라도 눈을 뜨며 살아가고 싶다. 여러분도 그러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