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과잉의 불똥이 예술작품들에 튀는 일 없기를
최근 열렸던 '프리즈 서울 2023'에 관람가서 변월룡(1916~1990)의 보석 같은 대표작 '어머니'를 봤던 감상평을 며칠 전에 올렸다. 그런데 빠뜨린 얘기가 하나 생각났다. 변월룡의 그림들을 계속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한 것이다.
변월룡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난 소련 국적의 고려인 화가였다. 북한에서 거주했던 기간은 짧았다. 레핀미술대학의 부교수로 근무하던 무렵 소련 당국으로부터 북한과의 문화 교류를 위해 북한에 파견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1953년 7월부터 1954년 9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북한에서 화가 활동을 했다. 북한 평양미술대학 고문과 학장직을 맡았고 북한 미술가들을 지도했다. 북한의 많은 풍경들을 그리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을 추구했다.
그렇다고 변월룡이 특별히 북한정권과 관련되어 정치적인 활동을 한 것은 없다. 그래도 요즘 홍범도 장군의 그 시절 '소련공산당 입당'까지 문제가 되는 분위기인지라, 혹 우리가 변월룡의 그림을 보는데 어떤 제약이 따르지나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물론 최근 정치권에서 있었던 '정율성 역사공원'을 둘러싼 논란도 그의 음악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었고, 6.25 때 중국 인민군 위문활동을 했던 사람을 우리가 공원까지 조성하면서 기려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변월룡의 경우와는 다르다.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2016년 국내 전시회를 계기로 해금되었던 변월룡의 그림들에도 혹여나 어떤 이념적 꼬리표가 붙지나 않을지 지레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과거 변월룡의 그림이 국내에 전시될 때까지 정치적인 이유로 여러 차례 불발된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단지 기우만은 아닐 수도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변월룡의 '어머니' 같은 작품을 접하면, 그 시절 '우리들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전해주는 이 그림 어디에 이념이 들어갈 자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와 이념의 차이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예술임을 생각하게 된다.
지난 9월1일 국립극장에서 여자경 지휘자가 국립관현악단과 함께한 <디스커버리> 공연 때도 그랬다. 이날 마지막 곡으로 연주된 것이 북한의 작곡가 최성환의 '아리랑 환상곡'이었다. 이 곡은 서양 관현악과 국악관현악이 섞인 곡으로 작곡되고 변주되어 연주되었는데, 이날 들어보니 국악관현악으로 서양관현악의 선율과 비슷한 소리가 나오는데 놀라웠다. 이 곡은 세계적인 지휘자 로린 마젤이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북한의 동평양대극장 무대에서 연주를 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평가받는 유명한 곡이다. 아마 이념을 초월한 남북의 정서를 나눌 수 있는 음악을 꼽으라면 대표적인 곡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작곡가 최성환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있지 않다. 단지 북한에서 '공훈 음악가'였고, 북한을 대표하는 국가적인 음악가였다는 정도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정성환 역시 북한을 대표하는 작곡가였다는 이유만으로 혹여 그의 음악을 들을 기회가 차단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다. 다행히도 국립관현악단에 의해 이 아름다운 '아리랑 환상곡'이 정말 아름답게 연주되었다.
나치의 협력자였고 히틀러가 그토록 좋아했던 바그너가 떠오른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넣고 학살할 때 바그너의 오페라극 ‘탄호이저’ 3막에 나오는 ‘순례자의 합창’이 울려퍼졌다.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발퀴레의 기행’은 나치 군대의 행진곡으로 사용되었다. 바그너는 반유대주의자라는 점에서 히틀러과 한묶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역사가 있었다고 해서 오늘 세계인들이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의 아름다움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바그너의 죄는 밉지만 그가 남긴 예술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요즘 이념, 이념 하니까 사회적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공연히 예술작품들에도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지레 걱정이 든다. 혹여라도 이념과잉의 정치가 예술에 대해서까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일은 없으리라고 믿고 싶다. 분명한 것은 이념과 정치는 짧지만 예술은 길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