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창선 May 14. 2017

박완서, '틈바구니의 숨결'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 나타난 틈바구니 의식

박완서의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을 그리는 단편이다. 가족들은 항암 치료를 받게 된 남편의 벗어진 머리를 가려주기 위해 모자를 하나씩 사서 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모자는 여덟 개가 되었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는 ‘틈바구니의 숨결’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정연희에 따르면 박완서의 ‘틈바구니 의식’은 위계적 이분법에 함몰되지 않고 의미 있는 타자를 발견함으로써 틈새의 숨결을 찾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틈새에서 드러나는 것은 문명이나 이데올로기의 껍데기를 걷어낸 삶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중에는 틈바구니에서 느낀 분노의 고백도 나온다. 밤새 죽어가던 남편을 위해 CT촬영을 하러 이른 아침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원 노동자들은 파업 중이었다. 자신이 노동자의 편이라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던 작가였다. 자신이 노동자라서가 아니라 억압하는 쪽보다는 억압당하는 쪽을, 가진 자보 다는 못 가진 자를 편드는 건 자신의 기본적인 도덕심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하지만 병원에서의 황망했던 그 순간, 작가는 동질감보다는 반감이 앞섰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작가에게는 그들 또한 막강한 강자로 보였다. 강자란 무엇인가? 목청 높은 가해자가 곧 강자인 것을. 그들이야말로 지금 그 두 가지를 완벽하게 겸비하고 있다고 작가는 생각했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의 마지막에 나오는 ‘틈바구니의 숨결’에 관한 얘기이다.


“나는 요새도 가끔 그가 남긴 여덟 개의 모자를 꺼내 본다. 

그 안에서 머리카락 한 오라기라도 찾아보려고 더듬어 보지만 번번이 헛손질로 끝난다. 

그 여러 개의 모자는 멋이나 체면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민둥머리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몸을 차디찬 땅 속에 묻은 건 확실한데 

아침마다 우수수 지던 그 숱한 머리카락은 지금 어느 만큼 멀리 흩어져 티끌로 떠도는 걸까. 

생명의 가없음이 티끌과 다를 바 없다는 속절없는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그의 흔적을, 남긴 물질에서 찾는 것보다는 남긴 말이나 생각에서 찾는 게 

그래도 조금은 덜 허전하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고, 잘난 척할 줄로 몰랐기 때문에 담소는 즐겼지만 그럴듯한 말은 할 줄 몰랐다.

우리 집엔 그 흔한 가훈도 없다. 

그의 말이 생각나는 것도 그가 끼면 편안하고 여유로워지는 담소 분위기이지, 

멋있거나 뜻깊은 말뜻은 아니다.


오직 틈바구니만이 예외다. 

내가 생긴 틈바구니에 끼여 보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일까? 

그런 생각이 나를 자꾸 심각하게 한다. 

그가 나 대신 가 주던 동회나 세무서에 볼 일 보러 가서 똑똑지 못하게 굴다가 

구박 맞으면 이게 틈바구닌가 싶기도 하고, 

사용자와 노동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칼자루 쥔 자와 칼날 쥔 자, 

통일꾼과 반통일꾼이 서로 목청을 높여 싸우는 걸 봐도 

전처럼 선뜻 어느 쪽이 옳거니 양자택일이 안 되고, 또 그놈의 틈바구니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봐란듯이 틈바구니에 끼기 위해선 거친 두 목청 사이에 낀 

틈바구니의 숨결을 찾아내야만 할 것 같다. 

어쩌면 그는 그때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에서 

어느 만큼은 내 원색적인 분노를 관조할 수도 있었기에 해본 

단순한 연민의 소리일 뿐인 것을 내가 괜히 심각하게 구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틈바구니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 않는다. 

그가 남긴 모자가 나에겐 모자라는 물질 이상이듯이 

틈바구니란 말 또한 이상의 것, 한없이 추구해야 할 화두임을 면할 수가 없다.“

- 박완서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가운데서


* 나의 생각.... 틈바구니 의식은 세상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고 자기 삶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낼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일 게다. 그 틈바구니에 비로소 나의 숨결과 목소리가 있을 것이기에.

작가의 이전글 박완서의 자식 잃은 슬픔, 그리고 세월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