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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토 Dec 29. 2020

2000달러가 반토막이 났다고

역병의 기운을 감지할 수 없었던 작년 12월엔 캘리포니아 여행을 했다. 항상 가장 저렴한 코스를 찾아내는 남편의 노력?으로  우리의 불편을 팔아야 했지만 지금 와 생각하니 그것조차 감사한 일이었다.  캘리포니아 여행을 끝내고 온 남편은 오자마자 다음번 여행 계획에 들어갔다. 다음번 여행지는 칸쿤. 20년 전 남편과 처음 만났던 캐나다에서 주변 친구들이 칸쿤을 다녀오면 그게 그리 부러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때 이야기일 뿐  난 이후의 고난을 예측이라도 한 듯 썩 내키지 않았다. 미국 내 여행도 힘들었는데 굳이 이 땅덩어리를 벗어나고픈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따. 하지만 남편은 다녀오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 큰소리를 쳤다. 


진짜 가는 거야?

모든 일정이 일사천리로 예약되었다. 남편은  하루 종일 노트북을 뒤적거리느라 눈이 다 빨 개질 지경이었다. 때마침 신생 항공사의 이벤트로 저렴한 가격에 비행기표를 예약했고. 괜찮은 퀄리티의 리조트도 찾았노라고 신나했다.  괜찮은 퀄리티라는 건 남편 기준이라 확인할 방법은 없다. 내가 찾아본 곳들은 비싼 가격으로 모두  남편의 동의를 받지 못한터라 나는 뾰룡통한 마음으로 네가 알아서 하라고 뒷짐 진 상태였다.  숙소와 비행기표 예약을 마친 남편은 내일이라도 멕시코로 떠나는 사람같았다. 간 김에 치첸이사에 가서 마야 유적지를 보고 오겠다고 렌터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멕시코는 치안이 안전하지 않은 나라라 칸쿤을 제외한 지역을 여행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터라 나는 질색팔색을 했지만 고집쟁이 귀에 들릴 리 만무했다. 

남편이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치첸이사의 마야유적지


설마 못 가겠어?


당시 미국에 있던 우리에게 한국의 코로나 진행상항은 걱정되는 이슈였지만 피부로 와 닿진 않았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되었지만 이러다 곧 잠잠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일만 같았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이젠  중국, 한국등아시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CNN 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이 질병 소식으로 도배되었다. 이전부터 여행을 취소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계속 얘기해왔던 나는 이때쯤 되자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남편은 할인을 많이 받은 표라  취소가 불가능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칸쿤은 다시 가기 힘들 거라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상황을 봐가면서 어떻게든 가보자는 것이었다.  누군가 미친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2월의 미국에서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 시민권도 없는 유학생 비자를 가진 우리가 미국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아이들을 데리고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은 나도 이번에는 완고했다. 


줬다가 뺏기 있어?


우리의 싸움은 어떻게 되었을까? 국외여행이 금지되었다. 고집을 부렸다면 비행기를 탔더라면  어떤 상황이 펼챠졌을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이제 환불의 문제가 시급했다.  처음엔 리펀드를 해주겠다던  리조트 업체와의 약속으로 은행에서는 환불금을 통장에 입금시켰다. 이거라도 돌려받은 게 어디나며 기뻐하던 우리는 얼마 뒤 그 돈을 다시 빼앗겼다. 은행에 환불금을 지불하기로 했던 업체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은행에서 그 돈을 다시 인출한 것이다. 이런 황당한 경우라니..'줬다가 뺐냐'라는 억울한 마음에 저 돈이면 내가..라는 생각까지 합쳐지자 알 수 없는 원망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다행기 비행기 측에서는 답장이 왔다. 하지만 돈으로 환불해 줄 수는 없으니  1년 내로 쓸 수 있는 포인트로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7월에 귀국 예정인 우리가 1년 이내에 미국으로 다시 여행 올리도 만무했고 이 신생 비행사는 아시아권은 운행하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주변에 포인트를 팔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시국에 여행은 힘들어도 이동하는 사람은 있을 테니 저렴한 가격에 양도하면 팔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주변에 넌지시 물어보기 시작했다. 델타였다면 금세 팔릴 법도 했겠지만 이 시골마을에서 아무도 모르는 이 신생 비행사의 포인트를 선뜻  사겠다는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 숙박비를 거저 날린 것도 화병이 날 지경인데 비행기표라도 팔아야겠기에 나는 드디어 두 팔을 걷어붙였다. 주변  지인들에게 물어보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난 적극적으로 페이스북에 광고를 시작했다. 중고 카페와 여러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비행기표를 팔겠다는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살던 아이오와주를 벗어나 옆 동네 미네소타 주의 학생회이며 여행커뮤니티에도 글을 올렸다. 



귀국을 한 달 반 정도 남기고 짐을 정리하고 시작했을 때쯤 페이스북으로 연락이 왔다. 미네소타주에 살고 있는 한 백연 여자인데 미니아폴리스 공항 근처에 살고 있어서 다행히 이 작은 비행사를 알고 있었다. 처음에 20% 할인이라고 써 놓았던 포스팅의 숫자는 이때쯤 50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거의 반 가격에 가져가는 덕분인지 항공사에 확인 전화를 통해 믿을만하다는 것을 확인한 때문인지 연락이 온 지 30분도 되지 않아 거래가 이루어졌다. 페이스북을 통해 송금되어온 900여 불을 보자 기쁘기보다는 조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이것저것 합쳐 2000불 가까이 구매했던 비행기표인데, 반도 안 되는 돈이 돌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고구마 몇 개 먹은 듯한 지난 몇 달간의 체증이 약간은 해소가 된 것 같았다. 이거라도 돌아온 게 어디나며 감사해야지. 앞으로 다시 거기에 갈 일이 있을까? 아마도 이번 생의 나와 칸쿤의 인연은 여기까지 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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