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기만 하면, 그 뒤에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문학사상, 2009) 중에서
배에 단단히 힘을 주고 글쓰기라는 달리기를 이제 막 시작했다. 하지만, 작은 일에 종종 그만두고 싶고, 하루키가 말한 그 리듬은 쉼 없이 단절된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이들에게 많은 작가들은 "꾸준히"쓰라고 충고를 한다. 잘 쓰기 위해서 필요한 건 멋들어진 기술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써내려 갈 수 있는 힘 - 근성-이라는 것이겠지. 타고난 체격에 근력 많은 나이지만 글쓰기 근성은 맨들맨들한 살코기 같은 상태인 나이다. 몸속에 1센티쯤 자라난 근육에 벌써 온몸이 뻐근할 지경이다. 그 1센티가 너무나 소중한 나는 개미 눈곱 만한 글성(글쓰기 근성)도 절대 잃고 싶지 않은 초보 글쓰기 선수이다.
몇 달 전쯤 열심히 블로그 글을 썼었다.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들을 뒤지며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고 나면 그렇게 뿌듯하니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방문자도 조회수고 얼마 되지 않는 초라한 블로그에 조금씩 윤이 났다. 하지만 그 재미가 오래가지 못했던 건 어느샌가 몰려온 댓글에의 부담이었다. 공개하는 위해 쓰는 글임에도 누군가의 댓글에 종종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의 생활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듯한 부끄러움과 그 부끄러움을 덜어주기 위해 조금의 위선을 더하고픈 충동이 매일 마음속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느 날 친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산본 왔다 갔어?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 어떻게 사람들 다 챙기고 사니? 건강 챙겨"라는 따뜻한 메시지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언니는 언젠가부터 나의 블로그를 정독하고 있었다. 책 보다 더 재미있노라는 감사의 말에 마음이 흡족하면서도, 나의 삶이 생방송되고 있다는 자각이 번뜩 일어난 것이다.
요즘 시대 대세인 인스타에는 매일의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내세울 거 하나 없는 나는 그 안에 차마 껴 보지 못해 이리저리 치이다 포기하고 있다. 한데 가만 생각해 보니 블로그도 이 브런치도 그것과 다를 봐가 없었다. 정확히 계산하면, 사진과 짧은 글쓰기가 대부분인 인스타에 비해 나의 내면을 낱낱이 까발리는 이 장문의 글들이 나의 투정과 부정과 서러움을 더욱 찐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별 볼 일 없는 비루한 내 삶을 내보이지 싶지 않으니, 빗장을 잠그고 우물 안에 가만히 들어앉으면 될 일이었다. 나는 역시 관종은 안 되겠어라는 자조적인 말들을 읊조리며
하지만 기어이 찾아 들어간 우물 안은 갑갑했다. 그리고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내가 좁은 우물 안 보다는 반짝반짝 빛나는 저 햇살 아래서 마음껏 하하하 소리 내 웃으며 살아가고픈 긍정형에 가까운 사람이란 것을 말이다. 본성과 반대인 단정한 삶에의 동경은 늘 있었지만 우울이 단정한 삶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글쓰기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눅눅한 나의 삶과 글을 따스할지 따가울지 모르는 저 햇볕 아래 내놓기로 결심한 것이다.
부족한 나의 글을 읽어주던 지인이 말한다.
"글로 이야기 나누니 좋아요. 우리 글에서 만나요."
그래, 나는 사실 글이 쓰고 싶었다. 글에서 이야기 나누고 글에서 만나며 그 온기와 따스함이 내 삶에까지 스며들기를 항상 꿈꿔왔다. 글에서 만나는 이야기들이 비단 따스하지 않아도 가끔 아프게 후비고 들어와도 그 또한 삶이니 괜찮을 것이다. 나는 이제 부끄러운 내 글을 내보이며 나는 관종기가 부족한 사람이란 자책을 그만하기도 한다. 언제 또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과 자조가 몰려와 간신히 다잡은 리듬감을 빼앗고 발을 헛딧게 해 넘어지게 할른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선은 달려보자. 그때 또 일어설 이야기들을 그때 찾아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