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나를 압박하던 세 가지 스트레스 - 대학원 과제, 학생들 중간고사, 집안정리-가 어느 정도 끝마쳐질 윤곽을 보이니 얼른 소파에 들어 누워 핸드폰과 혼연일체가 되고픈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마침 너튜브 짤로 보게 된 드라마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찾아보니 코로나 시기 이전에 방영되었던 꽤 오래된 드라마였다. 88세대 모쏠로 당시 젊음 이들이 겪던 허무함과 절망을 담아낸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비현실적이게 예쁘고 잘생긴 배우들이 제법 진지하고 아기자기하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었다. 세상 모든 건 beholder - 보는 이- 의 눈에 달려있다는 옛말처럼 40대의 아줌마에게 그들이 이야기하는 결혼의 의미가 특히나 가슴에 와닿았다. 매슬로의 5단계 욕구이론에 근거하여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를 위해 계약 결혼을 받아들인 여주인공은 존잘 남주와의 공동생활에서 사랑과 소속감의 단계를 거치고 마침내 존중의 욕구를 이룬 뒤, 자신의 꿈인 글 쓰는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마지막 5단계인 '자기실현의 욕구'마저 이뤄낸다. (얼굴도 지나치게 예쁜 애가 사랑도 꿈도 다 가진다는 편파적 설정임에도 꽤 재미있는 드라마였다.)
드라마를 보며 그 안에 '나'를 이입시키기에는 현실에 너무 쩌들었다. 하지만 저 5단계 중 나는 어느쯤에 있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도 있고 건강한 아들 딸과 많진 않아도 꼬박꼬박 월급 보내주는 남편도 있으니 생리적 요구와 안정의 욕구를 거쳐 3단계인 소속감의 단계까지는 무난히 이르지 않았을까 싶다. 한데 결혼한 지 20년 가까이 돼 가도록 도통 풀리지 않는 문제는 4단계의 '존중'이었다.
남편과 나는 이십 대 중반에 캐나다의 한 어학원에서 만났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우리는 쉽게 술친구가 되었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종종 여행을 다녔다. 한국에서 돌아갈 때쯤이 돼서야 우연하게 시작된 연애 비슷한 만남은 한국에 와서도 이어졌다. 하지만 현 남편의 대기업 입사와 함께 문제 많던 우리는 결국 헤어졌다. 이후 수많은 지난하고 비루한 이야기 뒤에 우리는 다시 만났고 둘 다 크게 의도하지 않았으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는 20대의 결혼이 평균이었던 시대와 30대는 되어야 결혼쯤 생각하는 시대에 끼여 있던지라 세간의 시선으로 보면 이른 결혼은 아니었지만 친구들 사이에선 꽤 빠른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충동적이고 인내심 없는 면에서 하나 다를 바 없는 우리 둘은 현실 따위엔 일도 안중이 없는 철부지들이었다.
시아버지는 대단한 부자는 아니셨지만 아들 셋 집 장만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보수적인 사고의 분이셨기 때문에 우리는 또래 친구들보다 넉넉하게 시작을 했다. 아들 셋 맏며느리지만 자주 집에 오는 것도 불편해하시고 제사 때도 부르지 않으시는 훌륭한 분들이셨다. 단 시아버지는 뼛속까지 자수성가하신 장사꾼이신지라 결코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으셨다. 아버님은 돈을 대주는 실질적 물주임을 우리가 - 특히나 며느리이며 남인 내가-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도록 단속하셨다. 명절 외에는 시댁에 내려갈 일 없는 365일 중 다 합쳐도 열흘이나 볼까 한 한가한 며느리였지만 어느 단 한순간도 내가 숨 쉬고 먹고 자는 이 집이 내가 아닌 우리가 아닌 아버님의 집임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어찌보면 인정의 욕구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냥 주는 대로 받고 사는 사람이 아님을 인정받고 싶었다. 나는 우선 돈을 벌어야 했다. 인내심이 없는 나였지만 닥치는 대로 수업을 했다. 학원에서 일하며 과외를 했고 아이를 낳으면서 학원을 나가기 어려워지자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생들 숫자가 많아지자 공부방을 내고 교습소를 내고 확장을 하고 학원을 내며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똘똘하지 못해 버는 만큼 모아야 한다는 것도 모른 채 끊임없이 나를 드러내기에 바빴다. 주 7일 일하는 딸을 뒷바라지하는 친정엄마와 친정을 위해 이것저것을 사댔고 두 아이에게 남들 보기에 번쩍번쩍한 사교육을 시켜댔다. 시어머니에게 가전제품과 브랜드 옷을 사드리고 지방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대출비용 같은 것을 책임지면 생활비를 주지 않아도 기꺼이 잘 살아낼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어떤 것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달려야 했다. 멈추는 순간 고장이 나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계속 달려야 했다.
남편의 유학으로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가야 했을 때, 빈강정 같았던 나의 삶이 까발려졌다. 절대로 까발려지고 싶지 않았던 죽도록 가장 보이지 싶지 않았던 남편에게 빈곤한 민낯이 까발려 보였을 때 나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나는 완전히 백기를 들고 15년간의 나의 오만함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철저한 반성과 뼈저린 후회로 숨 죽인 채 미국에서의 2년의 삶을 버텨냈다. 그 당시 내가 했던 반성이란 온통 돈에 대한 것뿐이었다.
"돈 잘 벌 때 부동산에 투자했어야 했는데"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돈 모았어야 했는데."
"애들한테 그렇게 비싼 유치원, 책들, 교구들 사줄 필요 없었는데."
"아, 그때 주식이나 사놓을걸."
그때까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안정되지 못한 채, 여러 도시를 돌면서도 나는 완전하게 깨닫지 못했었다. 반성의 내용과 대상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돌아온 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부동산 공부를 주식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의 삶을 위해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며 '미라클 모닝'을 했다. 나를 찾아야 한다는 모임에 들어가 나를 찾는 글쓰기를 했다. 생산성 앱을 배우고 동영상 툴을 만지고 비싼 돈을 들여 코칭 과정을 이수했다. 사람들을 만나 코칭을 하고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나는 점점 더 알 수없어졌고 점점 더 갈증이 났다.
갈증이 참을 수 없어졌을 때 이제 쓰러져서 그냥 가만히 누워 눈감고 싶어 졌을 때 나는 생각했다. 나는 수많은 이사를 거치며 안전함의 욕구를 채우지 못했구나. 가족을 위해 눈뜨며 밤까지 일해댔지만 나는 사실 온전한 소속감을 느낀 점이 없었다는 것을. 나는 늘 마음 한편 속에 아이들이 크면 이곳을 떠나리라 생각했다. 온전한 소속감이 있었을 리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항상 인정받고 싶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는 그런 인정과 존중에 목말라있는 나 자신을 한 번도 사랑해 주고 존중해 준 적 없었다.
이런 내가 자기실현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글쓰기는 내게 생존의 밥벌이가 될 수 없으므로 나는 우선 생존을 위해 살아야 했다. 그리하여 나는 글쓰기가 그리웠지만 차마 시작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이렇게 터트리듯 쏟아붓고 싶었던 수많은 나날들에 귀를 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하여 지금에 온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나의 글은 언제나 따뜻한 결말과 나름 소신 있는 엔딩구절 하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 같은 글에는 그 따뜻한 엔딩구를 넣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를 거쳐야 내가 나아갈 수 있으리란 걸.
나는 불행배틀을 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 나더러 고작 이런 일에 힘들어한다 질책한다면 충분히 인정한다. 나름 편안한 삶을 살아놓고 징징댄다고 꾸짖는다면 그 또한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만큼 불행하지 않다. 나는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한 번씩 뿌듯하고 감사하며 올해 뼈수술 이후 한결 부드러워진 남편과 한 번씩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나는 불행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글쓰기라는 나의 자아실현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존중에의 욕구가 필요하며 그것은 이리 쏟아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함을 깨달았을 뿐이다. 자기실현을 위한 글쓰기를 위해 배설의 쏟아냄의 글쓰기라는 시간 또한 있어야 함이다. 그리고 감히 그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나에 대한 존중에서 오는 것임을 이제는 안다. 그러니 이 부끄러움 또한 견뎌내어 봐야지.
삶은 말캉한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하지만 삶의 곳곳은 그 드라마 어느 한 장면 보다 더 짠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이라는 더 막강한 그것을 대본한 줄 없이 살아내고 있으므로. 그러니 오늘은 살아내고 있는 나도 너도 장한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