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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Jul 20. 2020

낯선 토양으로 옮겨진 어린 나무들

얘들아, 우리 미국으로 이사 가기로 했어.

큰아이 고2를 마쳤을 때, 작은아이가 중1에 막 입학했을 때 우리는 미국으로 이사를 왔다.

사실 큰아이는 고3이어야 했는데 고2를 마치고 자퇴 후 한 달을 집에 있다가 온 것이다. 험난한 고3을 시작하는 마당에 그렇게 하는 것이 친구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큰아이는 이과 1등급이었다.

그리고 이미 입시를 한번 치러봤다. 카이스트는 고2를 마치면 응시할 수 있는데 과학고도 아닌 일반고를 다녔음에도 대입시를 향해 맞추어져 있던 자신의 인생행로를 한순간 바꾸기 어려웠던 큰아이는 카이스트에 지원했었다. 만약 붙으면 자신은 한국에 남겠다는 비장함을 가지고.

"나보고 수능 준비하라는 거야, SAT 준비하라는 거야?" 하며 울부짖던 큰아이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작은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조건 교복을 입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의 결정에 대한 나름의 저항이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한 달 다니자고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교복을 사는 것이 아까웠지만 교복 입은 중학생이 되어 보고 싶은 바람까지 묵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2005년 3월 29일, 우리는 미국으로 이사를 왔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수선한 가운데 아이들은 근처의 공립학교에 들어갔다.

큰아이는 11학년에, 작은 아이는 7학년에. 두 달여을 청강으로 다닌 뒤 방학을 보내고 새 학기부터 다시 그 학년을 시작하는 조건이었다. 큰아이처럼 늦게 이민을 오는 경우는 가능한 낮은 학년에 배치받기를 원한다. 무엇보다도 영어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각각 11학년, 7학년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7학년부터 시작한 작은 아이는 그래도 괜찮았다. 중학생이니 착실히 따라가면 못할 것도 없을 듯싶었다. 문제는 11학년인 큰아이. 미국에서 11학년은 사실상 한국의 고3과 비슷하다. 11학년까지 진학에 필요한 모든 크레디트가 거의 완성이 되어야 한다. 12학년은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각 대학에 입학원서를 집어넣고 인터뷰를 하고 대학 방문을 하는 일정들로 꽉 찬다. 그런데 11학년에 완전히 새로 시작했으니...


나의 하루는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일로 채워졌다. 학교는 가까웠지만 스쿨버스에 올라탈 때 먼저 탄 아이들의 시선이 불편했던 아이들은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운전수 노릇은 작은 아이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그 시간은 온전히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이 되었다.


큰아이의 미국 고등학교 2년의 삶은 말 그대로 생존과 재설정의 피눈물 나는 시간이었다.

처음에 영어는 별 문제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청강 2개월 기간과 여름방학 동안의 ESOL 클래스로 이솔을 졸업했으니 영어는 잘 적응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영어는 두고두고 아이를 힘들게 했다.

한국에서 고2를 좋은 성적으로 마치고 왔으니 모든 학업과정은 순조로웠다. 특히 수학과 과학은 곧바로 두각을 보여 County의 수학경시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그 카우니에서 가장 수학을 잘하는 여학생으로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대입시는 학과 성적만이 다가 아니다. 지금의  한국처럼 각종 봉사활동과 인턴쉽, 그리고 과외활동 크레디트가 필요했다. 봉사활동은 시간과 경험의 문제였기 때문에 방과 후와 주말을 이용해 지역 병원에서 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스포츠에서의 크레디트는 달랐다. 


운동에는 별 재능이 없는 아이는 처음에 크로스컨츄리에 조인했다. 달리기야 인내심으로 하면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매일 방과 후 훈련을 해야 하는 시간 투자는 아이의 하루 일과상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선택한 것이 응급구조 요원되기. 

우선 YMCA의 응급구조 클래스에 조인했다. 사실 조인하기도 쉽지 않다. 일정 시간 내에 열 바퀴 정도 수영장을 돌며 수영 실력을 검증받아야 한다. 어렵사리 조인하 고도 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을 따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한 번은 YMCA로 데리러 가니 수영복도 갈아입지 않고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비치타월로 몸을 감싼 채 나오는 거였다.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울고 있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말에 흐느끼느라 말도 잘 못한다. 훈련 중에 아이가 슬랭을 못 알아들었나 보다. YMCA 코치는 터프 그 자체, 목소리가 울리는 수영장에서 슬랭으로 소리쳐대니 못 알아들은 거다. 말귀도 못 알아듣냐고 혼이 난 아이는 참담한 표정으로 울었다.

그래도 끝내는 해냈다. 내가 함께 수영장으로 가서 몇 번 victim이 되어 물을 먹어 준 뒤에 가까스로 응급구조요원 자격을 얻어냈다.


미국 중고등학교에서 체육활동은 주로 방과 후에 이루어지지만, 음악활동은 방과 후뿐만 아니라 시간 중에도 정규 클래스로 이루어진다. 코러스와 오케스트라, 그리고 밴드. 

큰아이는 초등학교 때 학교의 관현악부에서 바이올린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오케스트라에 조인을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의 경험이니 처음엔 무척 난감했을 것 같다. 

게다가 한국은 유럽식 음계 도레미파솔라시를 사용하지만 미국은 CDEFGHB로 표시한다. 처음 익숙하던 음계가 다른 것으로 바뀌면 쉽게 치환되기는 어려운 법. 마치 한국어가 바로 영어로 치환되기 어려웠던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처음에 선생님의 잔소리를 좀 들었나 보다.  나중에는 청소년 오케스트라뿐이 아니라 지역 성인 오케스트라에 까지 조인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끝내는 바이올린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대부분의 미국 고등학생들은 9학년(고1)부터 AP과목을 듣는다. 처음엔 한두 과목부터 시작해서 매 학년마다 들어 대개는 4-6개 정도를 듣는다. AP과목은 수업 후 별도의 시험을 거쳐 5점 만점에 3점 이상을 받아야 대학에서 학점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이런 AP과목을 딸아이는 11학년부터 시작해서 6과목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겨우 영어 모드로 바꾸기 시작한 아이가 AP를 들어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 어땠을까. 

한국에서의 자신감으로 무리하게 목표를 세우는 아이를 뜯어말리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이 크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아이보다 더 몰랐다. 여전히 치열하게 해내는 아이가 기특하고 고마웠을 뿐이다.


좋은 평점, 충분한 자원봉사 경험, 방과 후 활동, 스포츠 크레디트까지 2년 동안 거의 살인적인 에너지를 쏟아가며 미국 고등학교 과정을 마무리했다. 지금도 큰아이 고등학교 생활을 생각하면 떠오른 장면이 있다.

오후 3시, 하교 시간에 맞추어 픽업하러 학교로 가면 스쿨버스들은 거의 떠나고 그늘에 앉아  열심히 과제를 하고 있는 딸의 모습이다. 학교 과제는 그런 자투리 시간에 해야 다음 행선지, 병원이나 커뮤니티 칼리지 등으로 직행할 수 있었다. 


이런 치열한 과정 뒤의 시간도 녹녹지 않았다. 우선 고등학교 2학년까지의 크레디트는 한국의 것을 적용해야 하니 대학에서 그것을 어떻게 반영할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해서 큰아이는 지원 스펙트럼을 넓게 잡았다. 그 지역의 주립대학부터 시작해서 미국 최고의 대학까지, 무려 25군데나 지원서를 냈다. 왜 그렇게 많이 넣는지 묻는 나에게 아이는 자신의 현주소가 지금 어디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 지원 과정. 

25군데 지원한다는 소리는 25개의 에세이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소리다. 물론 기본적인 틀은 정해져 있지만 각 대학마다의 특성에 맞게 다시 조금씩 수정해서 하나하나 준비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기다리기. 

벌써 13년이나 지난 일이라 가물가물한 가운데 기억나는 몇 가지.

서류를 접수한 뒤 검토대상이면 대학들은 인터뷰에 응하라는 연락을 한다. 딸아이를 흥분시켰던 대학은 하바드였다. 하바드대학에서 지정해준 인터뷰어는 지역에 살고 계신 어떤 할머니. 하바드 출신의 그 할머니 집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인터뷰가 끝나기를 앉아 기다리던 할머니의 아담한 서재.

벽 모서리에 있던  작고 낡았지만 따뜻했던 난로는 지금도 생각난다.


그리고 이어진 합격통보. 큰아이에게 합격통보를 보낸 학교는 7-8군데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 몇 군데를 가보기로 했다. 가서 직접 보고 오피스도 방문해서 구체적인 것도 물어보기로 했다.

아이가 최종 고려했던 대학은 뉴욕대학, 로체스터대학, 그리고 버지니아대학으로 순서대로 가보았다.

아마 4월쯤이 아니었나 싶다. 집에서 근 7-8시간 걸려 도착한 로체스터는 뉴욕주 북쪽에 있었다. 갔던 날도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마치 겨울 같았다. 가는 동안에도 중간중간 눈발이 날렸다.

4월의 추운 날씨에 잔뜩 웅크린 딸아이는 모든 일정을 마친 뒤 이렇게 중얼거렸다. 

" 여기서 학교 다니면 내가 많이 춥고 외로울 것 같아." 

"그러면 안되지, 안되고 말고."


다음 방문했던 곳은 버지니아 대학. 토머스 제퍼슨이 세운 학교로 두어 주 더 봄에 가까워진 때에 방문한 탓도 있겠지만 샬롯츠빌은 봄꽃이 화사했다. 캠퍼스도 고풍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 둘러본 대학의 도서관은 아이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엄마, 나 여기로 올래요." 이 한마디로 그날 대학은 결정되었다.

버지니아 대학은 펀드가 많은 대학으로도 유명하다. 입학식 날 입학 관련 부서의 딘 한분이 강당에서 학부모들을 앉혀 놓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 학교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옵니다. in state를 적용받지 못하는 우수한 학생들의 경우에는 그 차액을 학교가 부담합니다."

 미국 대학은 in state, out of state 학생들의 학비가 다르다. 특히 주립대학은 더 하다. 그런데도 주립대학인 버지니아대학은 타주 학생들인 경우도 많은 그랜트로 지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큰아이의 대학생활은 결정이 되었다.


큰아이가 이렇게 고군분투하는 사이 작은 아이도 자신의 길을 한걸음 한걸음 가고 있었다. 작은 아이에게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 눈물 쓱쓱 닦고 다시 걸어가는.. 앞서 가는 자, 자신의 누나가 있었다. 


2005년 3월 29일 인천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 탑승장으로 가고 있던 가족 뒷모습. 미국이민.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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