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이민, 그 혹독한 전환
떠나기 며칠 전 모든 짐은 부쳐버렸다. 전문 이삿짐 업체의 젊은 일꾼들은 미처 정리되지 못한 모든 것들을 깡그리 패킹해버렸다. 부러진 우산과 버리지 못했던 플라스틱 크리스마스트리까지.
그리고 이민 가방 몇 개를 가지고 비행기를 탔다.
전날 삼겹살과 소주를 앞에 두고 보여주었던 호기와 자신감은 입국심사 때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민의 삶은 말 그대로 혹독했다.
사실 45살의 나이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시작하는 나이이다.
나 역시도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있었다. 사회복지계가 한창 팽창하는 시점이었기에 굳이 나라를 떠날 이유도 없었다. 지금 있는 직장이 맘에 들지 않으면 어렵지 않게 새로운 직장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나는 아예 다른 나라로의 이사를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의아하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의 결과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혼란스럽고 힘들었다.
모든 것을 재 부팅해야 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언어가 가장 먼저 다가왔다.
나는 내가 영어를 쉽게 익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천만의 말씀, 아니었다.
점점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을 때 못 알아들으면 그들은 쉽게 "Never mind"해버리고 돌아선다. 그때의 기분이란 말 그대로 참담하다. 45살의 창창한 나이에 이런 상황에 스스로를 빠뜨리다니...
성인인 우리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큰애는 고등학생으로, 작은애는 중학생으로 시작한 미국살이는 아이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나름 공부를 잘했다는 큰애도 수학 시험에서 Dime이 뭔지, Quater가 뭔지 몰라 헤매야 했고 작은애는 미숙한 영어로 '치노'라고 놀림을 받아야 했다.
언어 다음으로 큰 스트레스원은 의료보험이 없다는 것.
이민 초기의 과도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내 혈압이 올라갔고 높아진 혈압은 만성 두통으로 이어졌다.
아이들도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운동팀에 지원할 때마다 건강 체크를 위해 클리닉 방문을 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의료보험이 없으니 과도한 비용이 청구되었다. 그럴 때마다 내 혈압은 점점 더 올라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혈압으로 클리닉을 방문하면 우선 진료비를 낸다. 보험이 있으면 보험 커버리지에 따라 진료비가 없거나 있어도 2-30불 정도이다. 하지만 보험이 없으면 현금으로 처음 방문 시 150불 정도를(두 번째부터는 7-80불 정도) 지불한다. 일차 병원 방문에 15만 원이라는 게 말이나 되나? 게다가 약값은 또 별개다.
지금이야 실물가치를 기준으로 원화와 달러를 구별해서 인식하지만 이민 초기에는 1달러는 1000원으로 자동 계산이 되어 도무지 감당이 안되었다.
그동안 사회복지현장에서 늘 입에 달고 살던 '사회안전망'에서 나는 정말 벗어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큰 문제,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는가의 근본적인 문제에 맞닥뜨렸다.
산업공학을 전공한 남편이나 사회복지를 전공한 내가 특별한 기술이 있을 리 없었다.
이런 경우 대개의 이민자들은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직업이 결정된다.
우리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선 영어와 미국에 대해 잘 모르니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었다.
한국 이민자들이 많이 하고 있는 자영업인 세탁소, 케리 아웃, 그로서리, 리쿼 스토어, 청소, 그리고 우체부 등
하지만 그것들 중 무엇도 아무런 경험이 없으니 처음부터 해야 했다. 무엇이든 우선 취업을 해서 그 일을 알아야 했다.
일주일 만에 끝난 내 세탁소 취업 에피소드.
한국 신문에 난 구인광고를 보고 취업이 되었다.
세탁 공장의 카운터일. 근처 대학에서 공부하던 한국 학생이 하던 일 자리였다. 카운터는 세탁물을 받고 수선 요청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되어야 한다.
아무런 경험도 없던 나를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채용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어쨌든 일을 시작하고 매일매일이 긴장이었다. 무엇보다도 수선일이 들어오면 진땀을 흘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옷 수선을 하는 여자로부터 알 수 없는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수선 주문을 그렇게 받으면 안 된다느니, 지나치게 상세히 고객 요구사항을 적어놓으면 더 불편하다느니 등등. 그때마다 적절하게 수정도 하고 내 의견을 어필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초짜인 나를 정말 얕보고 있었던가보다. 거기에 전임 유학생의 능숙한 영어가 아니어도 카운터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나를 통해 확인을 해서인지 한주가 지난 금요일, 그녀와 친했던 세탁소 사장은 퇴근하던 나를 불러 놓고 그만 나오란다.
엥? 일주일 만에? 아무리 일을 못해도 한 달은 시간을 주고 지켜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항의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옷 수선하는 여자가 카운터까지 맡기로 했단다.
그렇게 5일 만에 잘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동안 살면서 처음 당해보는 해고, 아니 kicked out이었다. 그것도 특별한 내 귀책사유 없이 벌어진 해고에 어리둥절하다가 점점 참담함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모든 것을 다 경험해보고 선택할 수는 없다.
더더군다나 이민은 아무런 경험 없이 새로 시작하는 거다. 이민은, 여행은 말할 것도 없고 유학이나 주재원의 삶과도 다르다. 유학이나 주재원의 삶은 돌아갈 곳이 있는 삶이다. 하지만 이민은 돌아갈 곳이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새로운 곳에 적응해나가야 한다. 어린아이처럼 하나하나 경험하고 알아가면서 새로 써나가야 하는 삶이다. 태평양을 건너는 순간 사라진 것들을 좌충우돌의 경험으로 채워나가는 선택의 삶이다.
45년 동안 예측 가능한 삶을 살아왔던 나에게 이민이라는 선택은 '자,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처음이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지'라는 '아무것도 없고, 동시에 무엇이든 가능한 삶'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동안의 삶의 방향도, 삶의 전략도, 삶의 가치를 제외한 모든 삶의 방식을 재 설정해야만 했다.
나의 완전히 새로운, 그러나 혹독한 중년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