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강 May 17. 2022

쉼이 있는 삶을 위한 여행

나에게 쉼을 허하기로 했다.

내 일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37년 전, 결혼식을 막 끝낸 나는 남편 친구 차의 뒷자리에 남편과 나란히 앉아 김포공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사랑하는 남자가 내 손을 잡고 앉아있지, 지갑엔 폐백을 하면서 받은 여행비가 두둑이 들어있지, 앞으로 일주일 동안의 휴가가 펼쳐져있지, 내 가슴은 말 그대로 풍선처럼 부풀어있었다.

아,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일주일 동안 아무일도 안하고 놀기만 하는 여행이라니!! 

제주도 한라산을 오르려는 우리의 신혼여행은 억수같이 내리는 비로 변경되어 부산을 시작으로 하는 우리들의 고향순례 대행진으로 바뀌었지만 상관없었다. 제주도가 아니고 부산이면 어떻고, 한라산이 아니라 내장산이면 어떻겠나, 내 인생에 처음 있는 일주일간의 여행이라는 사실은 내 삶에 깊은 즐거움의 기억을 남겼고 육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날 미소 짓게 만드는 순간이 되었다.

(올림픽내셔널 팍, Storm King Trail 정상에서 바라본 Lake Crescent)


 내 인생 처음 와 보는 휴양지 휴가였다. 유적이나 명소를 찾아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말 그대로 쉬기 위해 찾아간 곳, 휴양지.

아이들이 어렸던 한국에서도 여름이면 지리산, 설악산 등을 찾아다니며 여행을 했지만 그동안의 여행은 말 그대로 좋은 곳과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여행이었다. 때론 휴식이 아닌 몸 고달픈 고행에 가까운 여행.


이민 온 지 십 년이 채 안되었을 때 나와 남편은 난생처음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낯선 세상에 적응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해야 했다. 우리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그렇게 처음 나선 휴양지 여행.

멕시코 캔쿤은 이곳 미국, 미국에서도 동부에서 가자면 그렇게 멀지도 않고 당연히 비용도 저렴했다.

아침 일찍 출발한 비행기는 조지아 애틀랜타를 거쳐 멕시코 캔쿤에 점심 즈음에 도착했다.

여행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공항입구에서 미리 예약한 승합차에 올라탄 우리들은 한참을 달려 무장한 경비원이 보초를 서는 호텔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짐을 던져놓고 나선 우리들 앞에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아!!, 에메랄드빛의 잔잔한 바다!!, 그 앞에 펼쳐진 하얀 모래사장!!, 느긋하게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

그들 중 한 사람이 된 우리들은 때늦은 점심 식사 메뉴를 앞에 놓고 입이 떡 벌어졌다.

고급 레스토랑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테이블 세팅과 서비스, 그리고 무엇보다 앞에 놓인 랍스터 요리!!

그곳은 정말 최고의 휴식을 제공하는 멋진 곳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뷔페식 아침 식사를 하고, 바닷가 그늘에서 읽던 책 얼굴에 덮고 졸음을 즐기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다 시원한 칵테일 한잔 하고, 그조차도 지루하면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를 하는...

그동안 살면서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가져보지 못한 호사스러운 4박 5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가 쉬러 휴가를 가야겠다고 하면 무조건 캐리비안 해변의 휴양지를 찾아가라고 권한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스스로에게 과분하다 싶은 보상으로 게으를 수 있는 시간과 호사를 누릴 권리를 주어야 한다.

(올림픽내셔널 팍, Rialto Beach에서 마주한 Pacific Ocean의 파도)


이번 휴가를 위해 나는 너무도 잔인한 사월을 보냈다.

우리 원가족 네 명에서 사위가 생기고 아들의 여자 친구가 생기면서 처음 갖는 온 가족 여행이었다.

준비성이 많은 딸 부부는 작년 말에 이미 플랜을 세우고 몇 달 전에 비행기 예약과 에어비앤비 예약을 끝내 놓은 상태였다. 말 그대로 여행 일정이 확정되어있으니 변경은 있을 수 없는 일.

문제는 같이 일하는 직원들 역시 그들의 확정된 여행 일정이 그즈음에 있다는 것이었다.

한분은 그즈음 태어날 손주를 보러 샌프란시스코에 가야 했고 두 분은 비즈니스 트립으로 한국엘 다녀와야 했다. 한국엘 가야 하는 분들은 한국에서의 상황이 그나마 유동적이어서 우리 여행 일정 전에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태어날 아기의 예정일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잔인한 4월'을 만든 이유였다.

4월 한 달 동안 풀타임 직원 두 분의 부재에, 그 부재중 또 한 분의 9일간 부재는 우리 부부를 주 7일 13시간 근무상황으로 내몰았다.

4월 한 달간 매일 아침 강아지 산책을 겸해 동네 한 바퀴 도는 정도의 자유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게다가 어쩌자고 노인분들 병원 진료 예약이 4월에 잔뜩 몰려있었는지... 그 와중에 약물 오남용이 명백한 통증 환자 한 분의 입소까지 겹쳤다. 아, 이런 것을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나??!!

4월 말쯤이 되니 휴가고 뭐고 괜히 여행 일정을 잡았다가 지옥행을 자초한 것 같아 후회가 막급이었다.

그래도 시곗바늘은 멈춤 없이 움직여 드디어 그 모든 어려움과 번잡함을 뚫고 지나 5월에 접어들었다.

새로 태어난 손주 사진을 전화기에 잔뜩 담아 온 분도 다시 자신의 자리를 지켰고, 한국을 다녀온 두분도 도착한 다음날부터 출근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들의 차례였다. 여행에서 막 돌아온 그들에게 인수인계할 사항들을 정리해 전달하고 며칠 전 입원했던 분의 퇴원 문제까지 처리를 해놓은 후 우버를 불렀다.

그렇게 우리의 7박 8일 여행은 시작되었다. 여행을 위해 옷이며 먹거리며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쫓기듯 비행기에 오른 나는 여행 출발 전의 설렘이나 기대와는 거리가 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까지 하면서라도 여행을 가야 하나??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성인이 되어 그들의 연인들까지 함께한 특별한 여행을 다녀온 후인 지금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특별한 7박 8일의 여행을 위해서라면 한 달간의 고생도 감수할만하다. 특별한 여행이 예정되어있었기에 한 달간의 어려움도 참아낼 수 있었고, 7박 8일의 여행이 있었기에 한 달간의 고단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쓴맛과 단맛이 교대로 반복되는게 인생아니던가!

(올림픽내셔널 팍, 신비롭기 그지없던 Hall of mosses 풍광)




그동안 너무 '열심히'만 살아오면서 '쉼'을 소홀히 했다.

작년에 작정했던 금요일 휴무 결심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바빠서, 늘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생겨서라고 변명해봐야 여전히 '변화'하기를 어려워하는 내가 여기 있을 뿐이다. 돌이켜보니 늘 그랬다. 늘 뭔가에 매달리느라 쉰다는 것을 무시해버렸다. 애써 쉬기 위한 계획을 세워도 실행하기에는 많은 주저함과 걱정을 이겨내야 했다. 때론 걱정했던 대로 일이 생겨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별 태클 없이 쉼을 누렸다. 이번 다녀온 7박 8일의 휴가처럼 말이다.


내가 신혼여행에서 처음 경험해보았던 일상에서의 완전한 탈출을 위해,

카리브해 바닷가 휴양지에서의 몽아 상태와 같은 온전한 심신의 휴식을 위해,

특별한 휴가를 위해 한 달간의 고된 격무라는 비싼 값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내 삶에서 '일상에서의 떠남'과 '쉼'은 계속 만들어져야 할것같다.

휴가를 다녀온 뒤 나는 다시 한번 그러기로 마음먹는다.


작가의 이전글 중매라니? 데이팅앱이 있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