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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Dec 28. 2022

나의 유럽여행은 시작되었다. (1)

아들과 함께 한 유럽 배낭여행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여권을 발급받았다.

작년에 멀쩡하게 갱신을 해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나의 어마무시한 실수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고, 이미 발급된 여권을 다시 발행해달라는 내 요청은 미국 공무원들을 어지간히 헷갈리게 만들었던가보다.

재발행 수수료를 결제할 카드 정보를 기록하지 않았다고, 또 그다음엔 동봉한 사진이 6개월 이상 지난 사진이라고 그들은 여권발행 과정을 스톱시켰다. 아마도 괘씸죄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다행히 지역 국회의원 사무실의 도움으로 하나씩 해결하면서 여행 사흘 전에 가까스로 여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내 실수에 대한 심리적 좌절과 충격만큼이나 그런 나를 이해 해준 가족들과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이 컸다.



사실 이번 여행은 딸 결혼식 일주일 후의 일정이었다. 

이미 자매들과의 힘든 여행을 다녀오고, 딸 결혼식을 치르느라 체력이 바닥난 상황에 해외여행이 가능할까?

코로나는 아닐지라도 끝내는 감기몸살을 앓아야 했던 내 몸이 따라줄까? 싶었다.

아들은 걱정 말란다. 이미 저 혼자 다녀와본 스케줄인 데다 노쇠한(?) 엄마를 고려해서 여유 있게 짰단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나름 단출하게 짐을 꾸렸다. 어차피 나서기로 한 여행, 내 어깨가 감당할 만큼의 무게로 배낭을 꾸리고 짐을 줄였다. 필요하면 현지에서 구입하면 될 터였다.

그렇게 배낭을 꾸려 차에 싣고 중간에 워싱턴 DC의 아들을 픽업해 공항으로 달렸다. 

자, 이젠 출발이다. 지금부터 나는 여행자이다. 

뒤에 남겨진 남편은 내가 두고 온 모든 일들을 감당해줄 것이다.


지난번 여행에서는 공항 내 키아스크를 이용해 보딩패스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아예 전화기 속 큐알코드로 보딩패스를 대신하고 있었다. 아들이 먼저 스캔하고 뒤이어 내 것을 스캔하는데 뭔지 잘 먹히질 않는다. 두어 번 시도하다가 내 전화기 속 메일함을 뒤져 다시 큐알코드를 불러내 스캔하니 겨우 되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나의 '노친네'의 모습에 살짝 의기소침해지려고 했다. 

여행 내내 이렇게 허둥대면 어쩌지??


공항 내부로 들어가자 아들이 전화기를 들고 열심히 어딘가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름하여 '비즈니스 라운지'.

내 평생 이코노미만 타봐서 공항 비즈니스 라운지는 딴 세상사람들의 영역인 줄 알았더니 아들이 우리도 가능하단다. 물론 비행기표는 싸디 싼 더블린 경유 Aer Lingus 이코노미이지만 자기가 가진 카드면 사용이 가능하대나 뭐래나, 쩝..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라운지의 안락한 의자와 음식들에 마음을 뺏긴 나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기로 했다.


초저가 비행기에 이골이 난 아들은 이번에도 더블린을 경유해서, 취리히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택했다. 최종 목적지는 이태리였지만 스위스의 인터라켄 풍광을 징검다리로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 덕에 나는 공항과 기차역에서 만나는 아이리쉬들과 스위스인들의 근소한 인종적 차이를 느끼는 경험을 했다. 짧은 머리에 작은 키, 통통한 몸집의 아이리쉬들은 어딘지 순박하고 수줍어하는 느낌이라면 취리히 공항에서 마주친 스위스인들은 큰 키에 날씬하고 창백한 피부로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같은 유럽의 나라들임에도 자신들의 조상이 누구인지에 따라 충실하게 자신들의 유전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게 무척 흥미로웠다.  



여행의 첫날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대륙으로의 공간이동으로 시간을 다 보냈다. 

미국 워싱턴 DC에서 아일랜드 더블린까지 7시간 비행, 더블린에서 스위스 취리히까지 두어 시간 비행, 취리히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Zurich HB까지, 또 거기서 다시 Interlaken으로의 이동. 그렇게 가고 또 가서 Interlaken의 에어비앤비 숙소에 들어갈 즈음은 한밤중이었다. 

몸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오느라 파김치가 되었고 낯선 풍광과 차가운 밤기운에 으스스 떨려왔다.


숙소의 높은 천장과 서늘한 실내 기온 탓이었을까?.. 아니면 숙소가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설산 가까운 곳이어서였을까?.. 아니면 시작되는 여행에 대한 나의 불안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는 묵직한 무엇이 피곤한 몸과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하지만 내일 아침부터 Lauterbrunnen의 멋진 풍광과 만나려면 서둘러야 한다. 그러려면 쉼이 필요했다.

나는 아들을 이층의 침대로 올려 보내고 애써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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