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색깔의 여행을 소망하며
7박 8일의 여행 일정이 마무리되는 마지막 날, 우리는 아침 7시 3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 시간을 고려해서 시애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했다.
처음 여행을 시작하면서 바라본 시애틀은 들뜬 마음에 밀려서 내가 사는 곳이나 별반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모습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을 안고 둘러본 '비 내리는 시애틀의 밤'은 저 멀리 보이는 해안의 불빛처럼 반짝였다.
시애틀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시애틀 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연고가 없기는 매한가지지만) 우리 부부는 아들 커플과 아들친구 커플의 만남에 함께하기로 했다. 명목은 아빠가 저녁식사를 내는 것. 어차피 우리도 저녁을 먹어야 했고 렌터카도 하나였기에 딸 커플을 시애틀에 사는 친구와의 만남 장소에 데려다주고 함께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내가 본 시애틀의 다운타운은 오래된 다른 도시들의 다운타운과 비슷했는데 주차공간이 협소한 것이나 도심을 달리는 전철의 모습과 분위기가 샌프란시스코와 비슷했다. 비싼 물가도 비슷했다. 우리는 무려 갤런당 5불 가까이에 기름을 넣어야 했는데 가솔린값은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그렇다 쳐도 시켜먹은 포 국수의 양도 가격에 비해 너무 적었다. 들리는 말로는 아마존 같은 IT기업들이 들어선 뒤에 지역 물가가 치솟았다 한다.
월남국수의 따뜻한 국물로 속을 덥힌 우리는 시애틀의 Gas Works Park으로 이동했다.
해질녘의 짧은 저녁시간을 활용해서 한눈에 시애틀을 바라보기엔 그곳이 적합할것같았다.
시애틀의 웰링포드 지역 남쪽 끝 Lake Union의 북쪽 해변에 있는 공공 공원인 그곳은 시애틀의 조경 건축가 Richard Haag가 디자인해서 1975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석탄을 이용해 가스를 만들었던 시애틀 열병합 발전소였다는 이곳에는 인상적인 모습의 공장 설비들이 금속 조형물로 한편을 지키고 있었다. 과거의 흔적을 현재 공원의 상징적 주제로 설정한 아이디어가 기발했다.
시애틀의 날씨는 누가 뭐라 해도 '비'아니던가.
주차장에 내리면서부터 한 방울씩 내리던 빗방울이 제법 옷을 적시기 시작할 무렵 저 멀리 보이던 해안의 건물들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마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보았던 것처럼...
해안을 따라 반짝이는 불빛들은 내려앉는 어두움과 빗방울로 아롱져 흔들렸다.
점점 거칠어지는 날씨에 서둘러 해안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디선가 야릇한 냄새가 맡아졌다.
대마초였다. 띄엄띄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니 저만치에 젊은 남녀가 다정하게 서서 대마초를 피우고 있었다.
냄새가 아니라면 그들이 일반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 대마초를 피우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미국에서는 점점 대마초가 합법화되어가는 추세이긴 하지만 공원에서 천연덕스럽게 피우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저물어져 가는 시애틀의 밤과 함께 우리의 여행도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모든 여행은 우리의 삶에 그 흔적을 남기지만 이번 여행은 좀 특별했다.
무엇보다도 어른이 된 아이들이 각자의 연인들과 함께 했다는 것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런 형태의 여행을 좀 더 자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첫 경험'이 소중하고 오래 기억되듯이 이번 여행에서 경험한 일들은 마음속에 오래 머물것 같다.
평소 요리라고는 관심도 없던 딸아이가 장보기부터 음식 장만까지 주도적이고도 능숙하게 해내던 모습들.
여행 일정을 짜고 매일매일의 일정을 조정하고 알려주고 운전 핸들을 책임지던 사위의 든든한 모습들.
남자 친구의 처음 만난 가족들에게 마음을 열고 스스럼없이 다가와주던 아들 여자 친구의 웃는 모습들.
연인과 친구까지 초대해 여행이 더 풍성하도록 특유의 친밀함으로 우리 모두를 하나로 엮어준 아들의 모습.
그들 모두와 매일 밤 불꽃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던 Bonfire 시간들.
이 모든 순간들이 함께 바라본 아름답고 신비한 자연의 모습과 함께 두고두고 내 삶의 힘이 될 것같다.
그들에게도 나와 함께, 우리와 함께 누렸던 시간들이 일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