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데이때 생긴 일
언젠가부터 꽃이 좋아졌다.
20대 초반에 즐겨 받았던 노란색 프리지어부터 시작해서 자잘한 빨간색 꽃송이의 석죽, 안개꽃에 감싸인 분홍 장미 한 송이, 아이들에게서 주로 받던 카네이션까지 종류를 불문하고 나는 꽃이 좋았다.
누군들 꽃을 마다할까만은 나는 나이 들수록 점점 꽃이 더 좋아졌다.
그런 나를 잘 아는 가족들은 내 생일이거나 무슨 날이면 다른 무엇보다도 꽃다발을 선물하고는 한다.
한때 경제성을 따져 꽃다발보다는 꽃화분을 원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축하하고픈 그 무엇만을 위한 꽃다발이 좋다. 아마도 꽃다발을 받아 화병에 꽂고 일주일 남짓 지켜보는 혼자만의 즐거움, 미련 없이 시든 꽃을 뽑아 버리고 화병을 비워내는 시간이 주는 일련의 마무리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꽃다발 선물을 받고, 그것을 음미하고, 비워내는 삶의 의례(ritual)가 나에게는 소중한 일이 되었다.
그 과정 속에서 '이렇게 축하받을 만큼 나는 충분히 소중하다.'라고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발렌타인데이였다.
하루종일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던 남편이 보이질 않았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어디 간 걸까?
조금 있으니 드라이브웨이로 들어오는 남편 차가 보이고 차에서 내리는 그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아, 오늘이 발렌타인데이였구나."
꽃다발을 들고 들어온 그는 가장 먼저 나에게 "해피 발렌타인!!"이라며 꽃다발을 건네었다.
코스코에서 사 온듯한 꽃다발은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발렌타인데이라고 잊지 않고 챙겨준 것이 고마웠다.
하지만 꽃을 지그시 쳐다볼 틈도 주지 않고 그는 그 꽃다발을 내게서 다시 받아 옆에 계신 할머니들과 스텝에게 순서대로 건네며 또다시 "해피 발렌타인!"을 외쳤다. 순간 나는 멈칫했지만 낯선 감정은 무시해버렸다.
그렇게 발렌타인데이 인 줄도 모르고 있다가 꽃다발을 받은 우리 모두는 남편의 꽃다발에 왁자지껄 떠들며 빈 꽃병을 찾아 꽂고 거실 식탁에 올려놓았다.
여러 가지 색깔의 장미와 초록의 이파리들은 너무도 싱싱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의 꽃'이 아닌 '우리들의 꽃'을 받은 나는 기분이 묘해져갔다.
그리고 그 기분은 점점 시간과 함께 분명해졌다. 마치 남편에게서 에누리 당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마도 그 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며칠뒤 우리 부부는 별거 아닌 일로 다투었다. 늘 그렇듯이 별거 아닌 일은 별거인 것으로 커져버렸고 우리 둘은 똑같은 레퍼토리로 싸우고 또 똑같이 서로 사과하며 화해했다.
그리고 그는 핑크색 카네이션과 안개꽃이 풍성한 꽃다발을 사와 내게 사과의 의미로 건네었다.
그 핑크색 카네이션은 여느 카네이션과 달리 장미와 접붙이기를 한 듯 장미향기가 났다.
게다가 풍성하게 감싸고 있는 안개꽃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꽃다발을 품에 안은 나는 사방을 뒤져 연두색 빈 꽃병을 찾아냈다.
그리고 아래쪽 줄기만 조금 자른 뒤 묶음 그대로 꽃병에 꽂았다.
이 꽃을 어디에 둘까?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꽃병을 내방 화장대 위에 놓기로 했다.
서랍장위에 붙박이로 큰 거울이 있는 그 공간은 정말 나만을 위한 공간이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쳐다보며 로션을 바르고 빗질을 하는 곳, 그곳에 '내 꽃병'을 놓기로 했다.
흰 서랍장 위에 놓인 꽃화병은 화사한 본래의 모습과 거울에 비친 두 가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꽃들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코를 꽃무더기에 가까이 댔다.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래, 이 꽃들은 나를 위한 꽃이야..."
남편은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나를 포함한 우리 시설의 모든 사람들에게 꽃다발을 안겨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늘 똑같은 노인시설의 무료함을 깨기 위한 작은 이벤트였겠지.
그리고 그의 의도대로 잠시 잠깐이지만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었다.
그 꽃 덕분에 일주일 동안 식탁 위도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하지만 식탁 위 '우리 모두의 꽃'을 쳐다볼 때마다 나의 마음은 그만큼 가라앉아버렸었다.
그가 나를 '우리 공동체중 한 사람'으로 대한 탓에 배우자로서 '에누리'당했다고 느껴버린 것이다.
사람관계에서 의도치않게 상대방을 에누리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 그런 경우있질 않나.
내가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를 길에서 우연히 만나 반가워하며 두 손 잡고 인사를 나누려고 할 때,
상대방이 지금은 바쁘다고 나중에 연락하자면서 급히 헤어져 사라져 버릴 때,
그 친구에게서 내가 에누리당했다고 느끼는 그것, 씁쓸한 느낌..
그럴 때 느끼는 그것이 '에누리'이고 이런 '에누리'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난다.
아마도 서로 간 기대의 차이 때문 일 것이다.
남편입장에서는 억울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냥 넘어가도 되는 발렌타인을 굳이 챙겨서 모든 식구들을 기쁘게 해 주려다가 일이 꼬였다.
아마도 처음엔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쩌면 여전히 무엇이 잘못된 건지 모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화장대 위 '나만의 꽃'을 '나만의 공간'에서 바라보면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람관계에서 '누군가'에게 ' 그 누군가'는 남과 조금 달라야 한다는 것을.
조금은 특별해야 한다는 것을.
그 특별함은 '그 누군가'를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할 때 생긴다는 것을.
특히 꽃다발을 선물할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