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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Nov 09. 2020

이름도 아니고 성을 바꿔 ?

 Lee씨, Park씨, Lee-Park씨

우리 집에 계신 어르신들에게 종종 물어본다. 

"할머니, 할머니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요?"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아세요?"...

치매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에 따라 대답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기억하는 것,

아무리 인지기능이 손상되어도 가장 마지막까지 기억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름이다.




나의 이름은 박숙희.

경상남도 창원이 고향인 부모님이 지으신 이름이란다. 

딸 다섯에 아들 하나의 딸 부잣집 딸들의 이름은 굴비 엮듯 엮어진 계집 희자 돌림이었다.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적 우리 반 친구중엔 나나 우리 자매들과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항상 있었고 심지어는 성까지 같은 경우도 많았다. 

이를테면 그 시절 경상도의 부모들이 선호하는 이름들이었다고나 할까. 

한때의 영자나 또는 미영이나 혜경이 같은. 

여하튼 너무나 흔한 이름으로 나는 한평생을 살았다. 옛날에 흔하고 쉬운 이름을 가지면 오래 산다고 계동(개똥)이라고도 지었다지만 너무 흔한 내 이름은 글쎄,,, 그럴듯하고 멋진 이름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써서 불러주기 전까지는.


남편과는 대학에서 만났다.

나는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 온 가난한 여학생이었다. 우리 집은 그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지 아마.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서울로 진학할 생각을 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조금 조숙했던 나는 그런 중에도 학도호국단(그때는 학생회를 이렇게 불렀다.) 문예부에 관여했고 남편은 학교 신문사의 기자였다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된 것은 매년 나오던 대학 교지를 만들기 위한 편집위원회에서였을것이다.

그저 어리버리한 후배와 추진력 있는 선배로서.


교지 편집이 다 끝난 후 어느 날부터 발신을 알 수 없는 편지들이 나에게 배달되어 오기 시작했다.

휴대용 타자기로 짧게 타이핑한 편지와 공연 티켓들, 

그리고 그 편지봉투에 찍힌 '숙희'라는 이름.                                      


'숙희'라는 이름은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이름이 되어갔으리라.

친구와 보러 가라고 두장씩 보내던 공연 티켓을 사며 그는 '숙희'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것이다.

'숙희'는 그렇게 누군가의 '숙희'가 되어갔다.

셀폰도 없고 전화도 여의치 않던 시절에 받았던 편지봉투 속의 내 이름은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누구인지 새롭게 깨닫게 했고 그렇게 '나'는 '내'가 되어갔다.


나는 한때 숙희라는 이름보다 성인 박 씨를 앞에 붙인 직함으로 주로 불렸었다.

성에 붙인 직함은 그대로 나의 사회적 역할을 드러낸다.

어떤때는 고지식 하지만 1인3역을 마다않던 성실한 젊은 직장인으로서, 또 어떤땐 후배 직원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내어주던 중년 직장인으로서의 '나' 말이다. 

이런 중에도 굳이 나를 이름으로만 부르시던 몇몇 인생의 선배님들이 계신다. 

그분들이 나를 숙희 씨로 부르실 때 나는 내가 더 살가웠다. 

사회적 역할자로서의 내가 아니라 그냥 '나'로 불릴때가.




그런 내 이름의 성씨가 십오년 전에 '박'에서 '이'로 바뀌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이 남편의 성으로 선택적으로 바뀐것이다.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일어난 일이다.

이민 신청 과정 중 미국은 아내의 성을 남편의 성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민의 서류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민감해서 나는 중간에 내 성을 찾아 '박'으로 돌려놓을 엄두가 나지않았다.

그래서 그냥 이숙희로 살기로 했다. 어차피 이방인으로 사는데 성씨가 바뀌는게 뭐 그리 대수랴.


그러던 성씨를 '박'으로 되돌릴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었다. 바로 시민권을 신청할 때였다. 

이민 와서 이미 5년이나 지났으니 마음만 있으면 고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5년동안 네 식구 모두 이씨 성으로 살았는데 아이들이 이참에 성을 바꾸겠단다. 

뭣이라?, 성을 바꾼다고???

이름도 스스로들이 선택한 새로운 이름을 쓰기로 하면서 성씨도 엄마 아빠의 성씨 모두를 쓰겠다는거다.


언젠가부터 한국에서도 양 부모의 성을 함께 쓰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지만 정작 내 아이들이 그동안 관습대로 써온 아버지의 성에다 나의 성까지 쓰겠다고하니 뿌듯하면서도 왠지 남편의 눈치가 보였다.

전주 이씨 혜령군파의 자손인 시아버지는 이민 오는 우리들에게 아이들의 이름이 올라있는 족보를 소중하게 간직하라며 싸서 건네주었었다.

나는 그런 시아버지의 아들인 남편이 아이들의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아이들의 결정을 밥상머리에서 전해들은 남편이 의외로 흔쾌히 동의한다. 

이씨면 어떻고, Lee-Park이면 어떠냔다. 오히려 엄마 성을 함께 쓰겠다는 아이들을 대견해했다. 

그래서 졸지에 아이들은 이씨도, 박씨도 아닌 Lee-Park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 둘이 내 성을 함께 쓰겠다고 하는 통에 나조차 박 씨 성을 되찾겠다고 하기가 어려워졌다. 

나조차 박 씨 성을 되찾겠다고 선언하면 남편만 외롭게 이 씨로 남을 터였다. 그래도 무슨 상관이랴마는,

아이들의 성에 내 성씨가 들어갔으니  나는 조금 양보해도 괜찮았다. 아니, 양보해야할것같았다.

남편의 통 큰 지지에 화답하는 의미에서라도.




하지만 15년이 지난 나는 아직도 이 씨 성이 어색하다. 

영어로 이름을 쓰거나 싸인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Lee라고 쓰지만 한글로 full name을 말할 때는 여전히 박숙희이다. '이숙희'라는 이름은, 아니 '숙희 리'는 내가 낯선 이방인임을 늘 일깨워준다. 

낯선 나라에서, 낯선 언어에 아직도 적응하려고 애쓰는 중년의 '나'말이다. 

활기찼고, 여러 역할에 동분서주하면서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꼈던 젊은 날의 '박숙희'에 비하면.


머지않은 훗날, 어쩌면 내가 기억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는 노인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할머니 이름이 뭔지 알아요?"

"내 이름? 알지, 내 이름은 박숙희야, 박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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