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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Jan 08. 2024

20년 전 선생님을 만난 딸

나는 왜 딸의 해후에 따라나섰을까?

"엄마, 이 00 선생님이 미국 뉴저지 동생집에 놀러 오셨다네. 한번 만나보고 싶긴 한데... 너무 멀어서..."

저녁마다 안부전화를 하는 딸이 20년 전 논술 선생님 소식을 전하며 아쉬움을 드러낸다.

"두 시간 반 정도의 거리는 미국에서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잖아, 운전해서 가면 되지 않을까?"

"그래도 혼자 운전해서 가려니 부담스럽네. 낯선 길이라.. 하지만 전화통화만 하기도 많이 아쉽고.."

"그래?, 그럼 엄마랑 같이 가자, 둘이 교대로 운전하면 되잖아."

"음,,,, 그것도 좋은 생각이긴 한데... 엄마가 이 00 선생님 만나본적이 있던가?"

"그럼, 수업료 내러 가서 두 번 만났지. 그땐 작고 당찼던 모습이었는데.."



이 00 선생님은 딸이 고등학교 때 만났던 논술학원 선생님이셨다.

이과였던 딸은 수학 과학과목은 문제가 없는데 국어영역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시험 결과도 늘 국어영역의 부족으로 힘들어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 나선 논술 선생님. 고등학생 딸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있던 이선생님에게서 도움을 받기로 했다. 두세 가지 역할수행으로 헉헉거리는 엄마를 대신해서 딸은 스스로 등록을 하고 이선생님의 지도를 받았었다.

딸과 선생님과의 인연은 그 뒤로도 페북을 통해 간간이 이어졌다가 이번에도 페북을 통해 소식을 접한 거였다. 미국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한국을 한번 다녀왔던 딸은 그동안 한국의 선생님들이나 친구들과의 연결이 거의 끊어져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이라 직접 찾아가 만난다는 것이 조금은 어색했을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모든 관계와 만남은 진정성과 남다른 노력이 있어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딸과 만나서 함께 뉴저지까지 올라가기로 하자 옆에 있던 남편이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집이 곧 시설이기도 한 우리 집 상황에서 시설을 벗어나 잠시라도 휴식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을 모르는바 아니라 우리 부부는 고민할 것도 없이 함께 나서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런데 제자만도 아니고 그 부모까지 따라나서서 선생님을 만난다는 게 어째 조금 오버하는듯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모두에게 좋은 일인데 오버면 좀 어떤가. 딸은 전화통화만이 아니라 거의 이십 년 만의 사제간 만남이 될 것이고, 늘 소풍거리를 찾는 우리 부부에게도 나들이 핑계가 생기는 것이고, 게다가 이틀간 내내 비가 내린다지 않는가. 그 빗길 운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 아니겠는가.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우리는 강아지까지 데리고 메릴랜드로부터 펜실베이니아 딸 집까지 두 시간을 달렸다. 간만의 장거리 드라이빙은 살짝 설레기까지 했다. 날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잔뜩 찌푸렸지만 우리의 마음은 가벼웠다. 그러면서 우리 둘이 주고받은 말. "어른이 된 딸의 옛 선생님과의 해후에 따라나서는 부모는 쫌 주책스럽다, 그치?, 히히 " 하지만 왠지 그렇게 해서라도 딸이 이선생님을 만났으면 좋겠다 싶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딸을 차에 태우고 다시 뉴저지로 향하는 길.

딸도 오랜만에 함께 하는 드라이빙에 약간 들떠있다. 매일 저녁 안부전화를 하면서 서로의 근황을 잘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못다 한 말이 많은가 보다. 한참을 떠들던 딸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다.

"아빠는 이선생님을 만난 적도 없고... 엄마는 이선생님을 어느 정도 알아? 이렇게 부모님과 함께 나타나면 당황하시지 않을까?" 

"당연히 당황하실 수도 있겠지. 하지만 두 시간 반 거리의 운전부담 때문에 옛 선생님을 못 만난다는 게 더 안타까운 거지, 그냥 네가 좋아했던 선생님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너랑 같이 드라이브도 하고."


선생님의 동생은 뉴저지의 아주 예쁜 동네에서 살고 계셨다. 우리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렸던 선생님 가족은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흰색꽃이 피어있는 난 화분을 가슴에 안고 이선생님이 밖으로 나오셨다.

기억했던 모습에서 조금 더 나이 든 모습의 그녀는 여전히 유쾌하고 활기찼다.


잔뜩 찌푸린 채 찬 부슬비까지 내리는 낯선 동네의 한 음식점에서 우리는 세 시간 가까이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두 번 만났을 뿐 차 한잔 나눈 적이 없던 나도, 아니 한 번도 뵌 적이 없던 남편도 딸과 이선생님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그녀가 이별의 선물로 딸에게 주었던 도덕경부터 논어, 유튜브 섭렵까지 우리들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또다시 이별해야 할 시간. 선생님은 다음날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우리도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딸 집에 도착한 우리는 하루동안의 운전과 궂은 날씨에 사위가 준비해 준 저녁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베개에 머리를 뉘이며 생각했다. 7-8시간을 운전하면서 그들의 만남에 함께 한 하루가 어땠나를, 그럴만한 의미가 있었는지를, 그러면서 나는 우리가 딸에게 참 좋은 시간을 선물했구나 생각했다.


다시 메릴랜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제의 시간을 반추하는데 무득 한 단상이 떠올랐다.

딸이 스스로 알아보고 등록하고 다니던 논술교실의 선생님과 내가 마주 보고 앉아있던 모습.

뒤늦게 찾아가 수업료를 내면서 선생님을 만난 자리였다. 다른 엄마들처럼 수험생 딸을 챙기지 못한 스스로가 민망해서 변명조로 던진 말이었다.

"내가 너무 바빠 아이를 잘 돌보지 못했네요.."

그렇게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선생님은 대답했었다.

"아니요, 어머니, 제가 봤을 때 00 이는 어떤 아이보다도 잘 돌봐지는 아이랍니다."

그녀의 분명하고도 확신 있게 대답하던 그 말. 그 말이 느낌 그대로의 말이었는지 또는 일하는 엄마에 대한 동병상련에서 나온 말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선생님의 그 말에 감사했고 안도했었다. 

지금 이렇게 불쑥 기억이 날 만큼.


그런 거였구나. 주저하는 딸에게 찾아가 꼭 만나보라고 했던 이유가...

딸에게 이선생님은 국어에 어려움을 겪는 제자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고 세상을 알아가는 여고생의 친구 같은 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엄마인 나에게조차 격려를 아끼지 않던 좋은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흔쾌히 따라가 주겠노라 했던 거였다. 비록 처음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었지만.


선생님은 이제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셨을게다.

딸이 기억하는 대로 여전히 친구 같은, 그러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자신의 소임을 하시겠지. 

딸에게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다른 많은 아이들에게도 그런 분으로 계속 있어주길 바란다.

그리고 딸이 그런 좋은 인연과 만남은 계속 정성스럽게 가꾸어나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 헤어지기전 아쉬운 허그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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