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 West에서 밤잠도 설치고 헤밍웨이도 만나고..
가끔씩 집을 떠나 어딘가로 갈 때마다 나는 여행은 인생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길고 먼 드라이빙을 견디며 일상의 반복과 지루함을 다시 경험하고, 먼 길을 찾아가 만나게 되는 경이로운 풍광 앞에서 삶의 짧은 기쁨을 경험한다. 그래서 여행은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에 스타카토를 주면서 '삶은 이런 것'이라는 자각을 다시금 갖게 한다.
이번 플로리다 여행에서 나는 여러 면에서 특별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미국 국내 여행이면서도 전혀 다른 풍광과 경치를 마주했고, 숙소 선택과 일정 중 끔찍한 실수를 경험했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여행 후유증은 오래갔다. 이번 여행기도 두주가 지나서야 쓸 수 있을 정도로 떠올리기조차 힘든 일도 있었다. 그런 중에 나는 "인생이라는 여행길에 크고 작은 불행은 마치 도둑처럼 어느 날 황망하게 찾아온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플로리다 여행은 지난 연말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플로리다가 어떤 곳인가?, 무지하게 덥고 습한 곳 아닌가, 그런 곳은 여름이 아니라 겨울 언저리에 다녀와야 제맛 아니겠는가.
그렇게 계획된 여행은 몇 번의 연기를 거친 뒤 지난 3월 중순에 드디어 비행기 티켓팅을 했다.
3월 13일에 시작된 일정.
단출하게 각자 배낭 하나씩만 챙긴 가방 속엔 속옷과 세면도구, 그리고 얇은 긴팔의 봄옷 두어 벌이 들어있었다. 비행기 속의 냉기나 혹시 모를 추위를 위해서는 두툼한 겉옷을 걸치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일 아침의 날씨는 무르익은 봄날처럼 따뜻해서 집을 나서기 직전 두꺼운 겉옷은 벗어버리고 대신 반팔 셔츠 하나씩을 배낭에 더 쑤셔 넣고 출발했다.
여행을 나설 때면 늘 뭔가 한 가지씩 빠뜨려서 아차! 싶은 것이 있는데 이번에는 허리춤 가방이었다.
해외여행이었다면 당연히 챙겼겠지만 운전면허증만 챙기면 되는 국내 여행이었기 때문에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옷이며 이런저런 여행 준비가 미흡한 채로 여행은 시작되었다.
( 허리춤 가방을 못챙긴 작은 실수가 어떤 엄청난 불행을 가져왔는지는.... 다음 글에서 써보려 한다.)
처음 일정은 Fort Landerdale에 도착해 차를 렌트하고 Key West까지 가는 거였다. 플로리다 끝에 산호로 이루어진 Keys 제도 중에서도 맨 끝에 위치한 Key West는 플로리다 위쪽 도시들보다 불과 90 마일 거리의 쿠바에 더 가까운 곳이다.
이제까지의 여행이 서부나 동부여행이었다면 이번엔 미 대륙의 최남단이다. 그것도 한번 가본 적이 있는 올랜도나 마이애미가 있는 동부 쪽이 아니라 Tampa가 있는 반대편의 National Park을 가볼 예정이었다.
차로 한참을 달려가면서 보니 역시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동부나 메말랐던 서부와도 많이 달랐다.
내가 사는 곳과 비교해서 눈에 띄게 다른 것은 열대나무 가로수뿐이 아니라 허리케인에 대비한 듯 무지하게 두껍게 (또는 사각기둥처럼) 박혀있는 전신주들과 신호등, 그리고 벽돌로 짓고 있는 집들이었다. 매년 들이닥치는 허리케인에 꺾이거나 날아가지 않으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할 듯싶었다.
네시간정도 달려 미대륙 최남단 Key West를 찾아가는 길은 끝없이 이어지는 습지, 바다와 섬의 연속이었다.
푸른 바다와 하늘, 섬들을 잇는 다리들, 바다 위로 펼쳐지는 석양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드디어 도착한 Key West.
이곳의 어지간한 숙소는 2-300백 불이 넘는다. 몇십 년 전 이민 온 부유한 쿠바인들의 집들을 개조한 호텔들인데 숙박비로 쓸데없이 낭비하고 싶지 않은 우리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유스호스텔에 묵기로 했다. 하룻밤인데 공용 화장실과 이층 침대면 어떤가.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게 있었다.
바로 소음문제.
아직 시즌이 아니어서 절반밖에 차지 않은 유스호스텔의 매니저는 친절하게도 우리 부부에게 다른 여행객이 없는 방을 내주었는데 하필 그 방이 도로변이었다. 휴양지인 그곳엔 밤이 늦도록 차들이 드나들었고 공사로 파헤쳐져 있는 도로에서의 차 소리는 견딜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는 수없이 우리는 다른 방으로 바꾸어달라고 해야 했는데 이번엔 에어컨 소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방에서는 우리뿐이라 시끄러운 에어컨을 꺼버릴 수 있었지만 바꾼 방에는 혈기 왕성한 젊은 친구들이 에어컨을 최대치로 켜놓는 바람에 시끄러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참다 참다 이러다가 날 밤을 새울 것 같아 우리 둘은 다시 처음 방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시각은 이미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뒤척이다 까무룩 잠이 들었을까, 어디선가 낯익은 수탉 홰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어디?, 우리 집인가?, 아니다. 닭 울음소리가 조금 다르다. 우리 집 수탉이 "꼬끼요오오오오,,"라고 운다면 여기 소리는 "꼬끼요오옷!" 하면서 뒤끝이 뚝 잘린 소리다. 수탉이 아니고 이름 모를 바닷새일까?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간 우리는 작은 몸뚱이의 수탉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울어대던 녀석들은 바로 그 녀석들이었다. 어떤 수탉은 암탉 한 마리와 짝을 지어 돌아다니고 어떤 암탉은 아기 손바닥만 한 크기의 병아리 한 마리를 데리고 도로가를 아슬아슬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기는 닭들을 울타리 없이 키우나?, 아니면 주인 없는 '길거리 닭' 또는 '야생닭'들인 건가?
현지인 어느 누구도 녀석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야생닭인듯싶었다. 아니면 쿠바인들이 본국에서 데려온 닭들을 물자 풍부한 미국에서 더 이상 먹여 키울 필요가 없어져 방임해 버린건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주인 없는 닭들이 길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풍경은 흥미로웠다.
Key West 하면 Hemingway를 빼놓을 수가 없다.
헤밍웨이는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이곳 헤밍웨이 하우스에서 살면서 낚시와 집필활동을 하면서 살았단다.
네 차례나 결혼을 하고 미국, 유럽, 쿠바를 떠돌며 살다가 자살로 삶을 마감한 헤밍웨이가 십 년 가까이 마음 붙이고 집필하며 살았던 곳, 두 번째 부인 폴린 파이퍼와 살며 스페인 내전에 종군기자로 가기도 하고 그 경험이 녹아있는 소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을 집필했던 곳.
방마다 벽에 걸려 있는 그의 사진과 책들, 그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의 포스터들, 무엇보다 헤밍웨이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일상의 공간들.
헤밍웨이의 집은 아담하고 예스러운 멋과 소설적 이야기와 고양이로 이어지는 생명력을 안고서 방문객들을 맞고 있었다.
오래전 읽었던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를 다시 찾아 읽으면 느낌이 그때와는 다르려나?... 아마도 그럴것같다.
본채와 떨어져 있던 집필실에서 문장을 썼다 지우며 혼자만의 고독한 작업에 몰두했을 헤밍웨이가 그려졌다.
다시 차를 타고 Keys 제도를 벗어나 세시간 정도 달려서 찾아간 곳, Everglades National Park.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공원 어딘가에 있다는 트레일을 걸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오후에 접어들고 있어서 차로 내셔널 팤을 둘러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것을 주마간산이라고 해야 할까?
세상에서 가장 큰 열대 습지인 Everglades National Park에 간다면 꼭 들러야 한다는 곳조차도 차로 둘러본 뒤 Flamingo Lodge & Restaurant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짧은 일정 탓도 있지만 충분히 여행을 준비하고 계획하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날 국립공원 내에서 카약 타기가 예정되어 있으니 Aligator ( 강에 주로 사는 악어의 일종)를 볼 수 있는 강과 습지의 진면목은 내일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맹그로브 숲과 드넓은 습지는 내일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고 우리는 숙소가 있는 Naples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