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강 Jun 16. 2021

봉순이 언니와 우리집 그 언니

내 어린날의 그들이 부디 잘살고 있기를..

공지영의 소설 중 '봉순이 언니'에 나오는 한 장면.


미국 유학을 다녀온 아버지가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고 점점 형편이 나아지고 있을 때,

온 가족이 저녁을 먹으러 시내로 나간다. 

그 집의 식모인 봉순언니는 들떠서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따라나서려고 한다. 

그러자 주인공의 어머니는 "너까지 가면 집 볼 사람이 없잖니?"라고 하면서 봉순이 언니를 데려가지 않는다.

아버지가 미국에 있을 땐 서부역 뒤 봉래극장으로 괴기영화를 보러 가는 날에 칠보단장을 한 봉순이 언니까지 함께 갔던 일에 비춰보면 사뭇 다른 상황이다. 


이 모습을 보고 주인공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언니가 얼마나 놀러 가고 싶을까, 아버지의 그 까만 차를 얼마나 타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어머니에게 봉순이 언니가 정말 우리 식구 아니냐고 묻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는데 어머니가 내 손을 잡으면서 중얼거렸다. 


"쟤가 너무 잘해주었더니 이젠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오려고 하네... 어디라고 지가 따라나서, 나서길, 주제를 알아야지. 참, 너무 잘 대해주어서도 안돼..."




정말 오래간만에 다시 읽은 '봉순이 언니'는 어느 순간 내 가슴속 깊이 가라앉아있던 기억의 앙금들을 어지럽게 일으킨다.

우리 집에 있었던 또 다른 봉순이 언니, 그녀에 대한 기억을.


내가 초등학교 3-4학년쯤이었을 것 같다. 일찍 학교를 들어갔으니 대략 9-10살 정도.

어느 날 우리 집에 나보다 서너 살 많은 낯선 언니가 살러 들어왔다. 

그녀의 이름도, 정확한 나이도, 하물며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녀의 불안한 눈빛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마도 나랑 같은 방을 썼고 내가 어느 정도 철이 들은 나이여서 기억을 하는 것일 게다.

아니 어쩌면 그 언니도 9살짜리 나와 동병상련의 아픔이 있어서 더 기억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야뇨증.


그 언니는 말이 별로 없었다. 이미 우리 집엔 고등학생부터 젖먹이까지 아이들이 여섯이나 있는 대가족이었으니 충분히 압도되었었겠지. 게다가 나이별로 우리는 이미 엄마의 숙련된 조수들. 그런 우리 집에 부엌일을 도울 누군가가 더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짐작해보건대 엄마가 필요해서 들인 사람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소설 속 '미경이'처럼.


그런데 언니는 심한 야뇨증을 갖고 있었다. 

나 역시 야뇨증으로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엄마의 꿀밤을 맡아놓고 맞다가 그즈음부터는 괜찮아지고 있었는데 그 언니는 나보다 서너 살이 많았음에도 대책 없을 정도로 심했다.

첫날, 이불이 다 젖게 오줌을 싸놓은 것을 본 엄마가 한숨을 쉬며 쉽게 빨 수 있는 작은 이불로 이부자리를 바꾸어놓았지만 열서너 살의 소녀가 그려놓은 지도는 엄마의 또 다른 일거리였다.

처음 며칠은 엄마도 참으시는 것 같았다. 당신의 자식들한테서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니 그러려니 하셨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언니는 매일이었다. 매일 아침 주눅 든 언니가 더 풀 죽은 모습으로 이부자리를 들고나가면 엄마의 짜증 섞인 잔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언니가 가고 없었다. 

어디 갔느냐고 묻는 내게 엄마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밥상에 올라온 반찬 중에는 단무지를 고춧가루와 참기름 등 양념으로 무친 반찬이 올라와 있었다. 그 언니의 솜씨였다. 

엄마는 "단무지 무치는 것 말고는 다른 반찬은 할 줄도 모르고, 그 나이가 되도록 오줌을 매일 싸대니 힘들어서 데리고 있을 수가 없구나"라고 하셨다.

온 식구가 둘러앉은 둥근 밥상머리에서 엄마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으며 나는 알 수 없는 미안함과 슬픔으로 밥을 먹기가 어려웠다. 

특히 가늘게 채쳐서 양념으로 버무려진 단무지는 입에 댈 수조차 없었다.




어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었지만 그 언니의 불안한 마음을 읽었던 것 같다.

소설 '봉순이 언니'에서 보면 봉순이 언니가 다이야 반지를 훔친 누명을 쓴 채 세탁소 총각과 도망을 가는 부분이 있다. 

야반도주한 봉순이 언니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미경이 언니가 들어온다. 

첫 만남에서 미경이 언니는 몇 살이냐고 묻는 어머니의 말에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 

자식이 여섯이나 되는 시골집에서 입 하나 덜기 위해 보낸 식모살이가 미경이는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아마도 나는 우리 집에 살러 온 언니에게서 미경이 언니와 같은 그런 두려움을 엿보았던 것 같다. 

그 언니가 매일 그려내는 이부자리 지도를 보며 언니에게서 나는 두려움과 슬픔의 냄새를 맡았던 것 같다.


언니는 왜 우리 집에 살러온 걸까? 

언니의 부모님은 어디에 있을까? 

언니는 왜 학교에 가는 대신 우리 집으로 온 것일까?


말이 없고 주눅 들은, 밤마다 지도를 그려 더 기가 죽어있는 그 언니가 나는 많이 가여웠다.

그러면서 생각했었다,  세상은 무엇인가가 많이 잘못되어있다는 생각.


나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데 왜 그 언니는 그렇지 못한 지,

나는 학교에 다니는데 왜 그 언니는 엄마의 부엌일을 돕는지,

나는 그렇지 않은데 왜 그 언니는 늘 불안하고 슬퍼 보이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 모든 것의 뒤에는 '가난'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때는 그런 '가난'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었으니까. 

말 수레를 끄는 길건너 아저씨네도, 어느 날 밤 몰래 이사를 가버린 만화를 잘 그렸던 내 친구네도. 


그리고 잊어버렸었다. 그 언니도, 그 언니의 야뇨증도, 나의 오줌싸개 시절도.

봉순이 언니는 그런 나에게 우리 집에 왔던 언니를 소환시켰고 자연스럽게 나의 어린 시절도 소환했다.


6-70년대, 우리 대부분이 가난했던 그 시절은 이런 식으로 내 삶에 편입되었다가 가끔씩 불현듯 나타난다.

그 시절엔 왜 그렇게 식모살이를 하러 대처로 나오는 어린 소녀들이 그렇게 많았는지,

왜 그녀들은 봉순이 언니처럼 불행을 달고 살았는지,

왜 우리 집의 언니는 그 나이에도 밤마다 오줌을 싸며 두려워하고  불안해했는지.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마음 한구석에 삶의 부조리함과 슬픔의 얼룩으로 남아있다.


몇 년 뒤 세상을 좀 더 넓게 보게 되었을 때 나는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는 내 또래의 미싱공들과 파리한 불빛 아래 밤늦게 일을 하던 공장의 여공들을 보게 되었고 그들은 봉순이 언니나 우리 집 언니의 또 다른 모습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내 모습이었을 수도 있었던..


세월이 지난 이제는 불안으로 가득했던 그 언니나 그런 언니를 바라보던 내 마음 모두 한 조각의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소환된 기억들은 그때 못다 한 그 무엇이 아릿하게 남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미 지나온 시간들 속에  '내 마음속 어린 내가' 그 언니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


오줌 싸도 괜찮다고, 언니가 무섭고 슬퍼서 그런 거라고.

언니가 만든 무친 단무지도 이제는 맛있게 먹겠노라고.

짧은 며칠이었지만 친절하게 대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노라고.

어딘가에서 만난다면 아무 말 없이 그냥 안아드리고 싶노라고.


언니는 봉순이 언니처럼 주인아주머니에게 끝내 밀쳐지는 일이 없이 살았기를.

집으로 돌려보낸 우리 엄마가 언니의 마지막 주인아주머니였기를.

언니가 다시는 집을 떠나는 일이 없었기를.


부디 소박한 우리 집까지 찾아들었던 모든 봉순이 언니들이 가난한 그 시절을 잘 살아남았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아줌마의 자전거타기 도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